▲위스퍼 '#여자답게' 캠페인최근 미국 생리대 회사의 광고가 '여자답게'라는 말에 깃든 여성혐오를 꼬집어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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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정희진은 여성혐오를 '공기와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명명했다. 여성혐오가 공기처럼 도처에 널렸다는 것이다. 남성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성 역시 '여성을 혐오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얼마 전 1차로에서 차를 타고 가던 중 반대편에서 한 차가 운전미숙으로 길을 막고 있어 그 뒤로 수십 대의 차가 교통체증을 겪는 것을 목격했다. 그때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운전자가) 여자겠지?'였다는 점에서, 뼛속 깊이 자리한 내 안의 여성혐오를 체감했다.
여성의 타자화란 '남성성이 여성성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하고 좋다' 혹은 취향과 기호의 문제처럼 언뜻 보면 사소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성의 타자화는 남녀 임금 격차부터 살인을 부르는 데이트폭력까지 생사를 결정짓는 차별과 폭력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위력적이다.
구별짓기에서 '언어갖기'로 진화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처럼 우리는 오랫동안 여성혐오를 '여성혐오'로 명명하지 못했다. '김여사, 김치녀, 된장녀' 여성을 설명하는 온갖 부정적인 명칭에 당사자 여성들의 대응은 분노가 아닌 '구별짓기' 전략이었다. 이른바 "나는 그렇지 않아(나는 더치페이 해,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아)" 방식이었다. 여성들은 부당한 비난을 비난자의 시선에 맞춰 '정당한 분노'로, 비합리적인 일반화의 오류를 '진실'인 것처럼 수용했다. 전형적인 객체이자 노예의 인식패턴이다.
그러던 여성들이 달라졌다. 비로소 자신들의 목소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특정 여성단체의 주도가 아닌 산발적 개인의 연합이었다. 우선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성범죄 모의 집단인 소라넷 폐지를 이뤘다. 이어서 여성들 스스로 거리로 나가 여성혐오에 희생된 강남 살인사건 피해자를 추모하고, 부당한 생리대 가격 인상에 항의했다. 비로소 여성들이 자신의 언어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이 목소리를 갖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말하고, 생각하고, 설치는' 여자가 싫다는 모 연예인의 표현처럼, 여성들의 언어는 과격하고 불편한 '히스테리'일 뿐이다. 그에 맞서 여성들은 질문한다. "왜 때린 사람의 폭력이 아니라, 맞던 사람이 울다가 내뱉는 욕설에만 끔찍이 반응하는 걸까?(홍승희)"
자신의 언어를 가지기 시작한 여성들의 최종 목표는 남성을 명백한 가해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여성 스스로는 잃어버린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남성과 동등한 주체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남성들에게는 공감과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공존을 위한 과정임을 인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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