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기사(1920년 4월 22일)
동아일보
제주의 명품 전복은 일본인들의 입맛을 돋우며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고 홍콩과 상하이 등지의 요릿집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미식가들이 찾는 제주산 전복 메뉴를 위해 수입에 열을 올렸다. 또한 감태는 공업용 아교와 화장품 원료로 재생산되느라 없어서 못 팔 정도였고, 우뭇가사리로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양갱으로 가공돼 소비자에게는 비싸고 귀한 과자로 팔려 나갔다.
당시 제주의 해안가에는 일본인들이 무작위로 지어 올린 통조림 공장이 성시를 이루며 제주 해산물의 경제적 가치가 증가됨에 따라 해녀의 생산활동은 움직이는 현금 은행이 돼 제주의 경제에 엄청난 활력을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수탈로 인하여 생산자인 해녀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해녀들은 분연히 일어났다.
해녀항일운동의 시발점, 1932년 1월 7일 제주도 하도리 시위 "악덕 상인 니노미야(二宮)는 물러나라! 니노미야를 옹호하는 마쓰다 서기도 물러나라!"1931년 1월 7일. 제주도의 하도리가 술렁인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른 300여 명에 이르는 해녀의 손에는 호미와 빗창이 들려있고 그 눈빛은 1월 매서운 칼 바람보다 더 서늘하다. 살을 에이는 모진 추위와 강풍을 헤치고 해녀들은 하도리에 모여 구호를 외치며 시위 행열을 지어 세화리 장터까지 걸어 가는 길이다.
놀란 세화리 주재소 경관대가 총칼로 무장하고 해녀 시위대의 행열을 해산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부근의 해녀들이 격하게 호응하며 시위대에 합류했고,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자 속수무책이 돼버리고 만다. 1931년 1월 7일은 세화리의 5일장이 열리는 날. 하도리에서부터 20리 길을 걸어온 해녀들은 장터의 가장 번화한 곳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22살의 부춘화 해녀가 단상에 올라 목청을 높인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해녀들은 이 추운 겨울 바닷속에 들어가 전복이며 해산물을 캐옵니다. 그런데 일본은 시세와는 상관없이 터무니없는 헐값에 우리의 전복을 매수해왔습니다. 우리 해녀들은 더 이상 이와같은 일본의 수탈에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전복을 캡니까? 왜놈들 배불려주려고 전복을 캡니까? 우리가 목숨 걸고 바당에서 캐 올린 이 전복이며 해산물을 왜 일본인에게만 매수해야 합니까? 해녀조합은 당장 일본인 지정 매수를 철회해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해녀들 모두 굶어죽고 맙니다. 우리 하나로 뭉칩시다. 그래서 해녀조합을 등에 업고 우리의 피를 빨아 먹는 일본인 니노미야를 몰아내고 그 밑에서 우리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매국노 고태영도 몰아내고 우리의 권리 우리의 손으로 지켜냅시다. 여러분! "1월 7일 세화리 장터에 모인 해녀 300여 명의 시위는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민족 말살 정책이고, 또 하나는 경제 수탈 정책이다. 당시 대공황에 허덕이던 일본은 전쟁에 광분하여 조선에서 가혹한 착취를 집행했다. 인적으로는 강제징용을 서슴지 않았고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간 것도 이 시기이며 물적으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탈을 일삼던 바로 그 시기에 제주의 해녀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분연히 들고 일어선 것이다.
신문 기사에 실릴 정도의 이 시위는 1932년 1월 7일이었지만 일본의 수탈정책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던 움직임은 이미 1930년 '우뭇가사리 부정 판매 사건'이후로 불거져 있었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해녀들은 크고 작은 규모로 시위를 계속해 왔음에도 억압은 계속되었다.
일본인들의 수탈은 악랄했다. 해녀들이 채취한 전복이며 해산물을 저들이 지정한 일본 사람에게만 판매하도록 해 놓은 것이다. 악덕 상인으로 표현된 니노미야(二宮)라는 일본인은 해녀들의 해산물 가격을 시세의 반도 되지 않는 헐값에 사들여 착취했다. 이를 참지 못하고 해녀들이 제값을 쳐 달라고 요구하자 '그렇다면 안 사겠다'면서 전복의 매수를 거절해 버린 것이다.
해녀들은 '해녀조합'에 공문서를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해녀조합장이 일본인이며 게다가 제주도지사까지 겸하고 있는 인물이니 그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했다. 그러는 사이 창고에 있던 전복이 모두 썩어버리자 해녀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월 7일 시위를 감행한 것이다.
1월 7일 하도리 해녀의 시위는 엄청난 결과를 몰고왔다. 일제 강점기 아래 수탈만 당하며 살았던 울분이 쌓인 가슴에 불을 놓은 것이다. 이미 목숨을 내 놓은 해녀들에게 총과 칼로 무장한 경관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렇게 제주 해녀항일운동의 흐름은 겉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