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전통시장시낭송을 하는 두 분 울산에서 온 손님들은 역시 파프리카와 과일, 그리고 장터에서 파는 색깔 고운 옷에 마음을 뺐긴다.
정덕수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장에 오면 빠트리지 않고 들르던 식당이 있다. 아버지를 따라 장에 올 기회라야 초등학교 6학년이 막 될 무렵부터 두 세 번이지만 명절 직전에 서는 대목장은 그만큼 풍성했다. 그전엔 친구들의 부모님이 장에 다녀오시며 사왔단 센베이과자나 콩을 볶아 물엿으로 뭉친 것 등의 군것질거리를 부러운 눈으로 봐야 했다.
6학년이 된 설 무렵 방학을 한 뒤 동생과 둘이 산에서 나무를 지개로 져다 장작을 만들어 놓은 걸 마을에 여럿 있던 여관에 팔았다. 그 얼마간의 돈이 아버지의 수중에 있었다. 자식들이 힘들게 한 장작을 판 돈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침 밥상머리에서 "양양의 대목장을 본 뒤 갈천 큰집으로 제사를 모시러 가자"고 하셨다.
서둘러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서자 곧장 늦으면 안 되니 얼른 버스를 타러 나가자 하셨다. 몇 년 안 되는 동안 마을엔 아침에 마을에서 출발해 양양에 나갔다 저녁에 다시 돌아오던 버스만 있었는데, 곧 낮에도 버스가 몇 번 더 다니기 시작했고, 오색령(한계령)을 넘는 직행버스와 완행버스도 한 해전부터 생기더니 이때부터 규칙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당연히 차편이 여유가 있는데도 서둘러 아침에 마을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러 나선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아버지를 따라 동생과 나섰다.
양양에 도착하자 곧장 아버지는 우릴 앞세워 이모가 하시는 옷가게부터 찾았다. "얘들 맞는 옷 한 벌씩 줘요"라며 이모한테 아버지가 말씀했다. 파란색에 흰색 줄을 세 개씩 넣은 추리닝을 한 벌씩 입히며 아버지는 "이 녀석들이 나무를 해서 그나마 올 겨울엔 갈천에 제사를 모시러 가려고"라며 이모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하셨고,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시던 이모부가 "자식들 이제 다 키웠구만요. 얘들 엄마만 있어도 저 고생들 안 해도 될 일을"이라며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