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1940)조선어학회 발행
박용규
둘째, 신명균은 일제의 우리말 말살과 창씨개명에 항거하여 1940년 11월 20일 자결하였다. 이에 대해 필자는 방증할 수 있는 여러 자료를 제시하였다. 일제는 조선 민족을 말살하고자 1938년에 학교에서 조선어 교과를 폐지하였고, 1940년에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일제가 우리말을 말살하고 창씨개명을 강행하자, 이에 항거하고자 그가 자결하였다는 역사적 사실(事實)을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죽기 하루 전날 신명균과 대화를 나눈 작가 홍구(洪九,1908-?)는 "일본제국주의 야만적 정치는 조선으로 하여금 영원한 노예화를 목적으로 언어와 성명을 박탈하였다. 그때 선생의 비분은 말할 수 없었다. 이것이 선생이 자결하시기 직전의 사회적 사건(事件)이었다."(홍구, '주산선생(珠汕先生)', <신건설>, 1945, 12, 48쪽.)
이관술(李觀述, 1902-1950)은 "연전(年前)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제도에 반항하여 자살해버린 신명균 선생이 있었다. 그는 일생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서 마쳤거니와 또 내가 안 단 하나의 철저한 반일적 민족주의자이었다"(이관술, '반제투쟁의 회상'(상), <현대일보>, 1946, 4, 17.)
김오성(金午星, 1908-?)도 "저 민족적 치욕이던 창씨제도에 반항하여 자살해버린 양심적 민족주의자 신명균씨 단일인이었다."(김오성, '이관술론', <지도자군상>제1권, 대성출판사, 1946, 168쪽.)라고 기술하였다.
조지훈은 조선어학회 회관을 1936년 늦은 가을부터 출입하기 시작하였기에 누구보다도 조선어학회 사정을 잘 알 수 있었다. <한국민족운동사>(1964)를 저술한 조지훈은 "창씨문제가 나왔을 무렵에 신명균선생이 그 스승 나철 선생의 사진을 품은 채로 자결하셨다"라고 밝혔다.(<고대신문>, 1955, 10, 31.; 조지훈, <돌의 미학>, 1964, 42쪽)
언어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조선어학회에 대해서도 일제는 1930년대 말엽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맹하라고 압박하였다.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조선어학회도 해산이 불가피하였다. 조선어학회의 간판도 '국민총력조선어학회연맹'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어학회는 외래어표기법의 통일과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마무리 중이었다. 이 일의 완성을 위해 조선어학회는 1939년 2월 6일 임시총회를 열어 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들어갔다. 그러나 간판의 교체도 용납할 수 없었던 신명균은 자결을 시도하였다.(한설야, '두견', <인문평론>, 1941, 4, 163-164쪽.)
이처럼 소설가 한설야는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항거하여 자결한 신명균의 고결한 삶을 길이 예찬하고자 소설 <두견>을 발표하여 후세에 남겼다.
조선어학회에서는 그가 11월 20일 별세하였다고 기술하였다.(<한글>, 조선어학회, 1940, 12, <지난달 소식>부분.) 이병기는 그가 양력 11월 21일에 음독 자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병기는 22일 홍제원 화장장에 나갔고, 오후 1시에 영결식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이병기, <가람일기>2, 신구문화사, 1976, 518쪽.)
독립운동사 전공자가 심사에 참여했는지 의문이상을 종합해 보면 신명균은 1940년 양력 11월 20일에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와 우리말 말살에 항거하여 음독 자결하였고, 그 날부터 계산하여 3일이 되는 11월 22일에 발인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공훈심사과는 이러한 자료가 일제의 탄압에 대해 항거하고자 신명균이 자결한 직접적이면서도 분명한 사유로 보이지 않는가? 이러한 자료가 일제에 맞선 항거 자료가 아니라면 필자는 할 말이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국민 여러분이 현명하게 판단하여 주고, 역사는 필자의 주장이 맞다고 평가해 주리라고 믿는다.
1962년 국가보훈처는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조병세와 민영환에게 각각 '대한민국장'을 포상하였다. 같은 해 을사늑약 체결에 찬동한 5적을 참수하기를 상소하고 1910년 9월에 단식 순사한 이중언에게 독립장을 포상하였다. 이에 덧붙여 자결 순국한 인사들이 포상 받은 사례는 많다. 신명균의 공적도 이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필자는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에 요구한다. 독립유공 포상 탈락 사유를 상세히 밝혀주기를 바란다. 달랑 한 줄로 기재함은 포상을 바라는 독립유공 후손이나 관련 인사들의 간절한 처지를 무시한 것이다.
자세히 밝혀주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울러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 구성도 다양하게 하기를 권고한다. 문화운동 관련 독립운동사 전공자가 심사에 참여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에 지적하는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7
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