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임금의 청사상의(도포)영조임금의 도포라 알려진 청사상의
파계사 홈페이지
1979년, 개금불사의 과정에서 보살상의 복장 유물의 존재가 확인되어 수습했는데, 전체적으로 16품목 75점에 이르는 양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복장 유물들이 단순히 불경이나 불상류의 전통적인 형태가 아니라 꽤 많은 이야기를 담은 다양한 유물들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것은 옹정(청의 연호, 경종 3년~영조 11년) 시절에 작성된 발원문 2점과 건륭(청의 연호, 영조 12년~정조 19년) 시절에 작성된 발원문 1점, 그리고, '청사상의'라 불리는 영조 임금의 도포의 발견은 승탑 구역의 사적비에 적혀진 대로 파계사가 이 절의 삼창주인 현응스님과 숙종대왕의 관계로부터 시작되어 영조와 정조를 거쳐 순종에 이르기까지 조선 후기 왕실의 후원을 받은 원찰이었음을 '역사적 사실'로 증명해주는 근거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 보살상은 또 다른 이야기도 간직하고 있었는데, 파계사가 왕실의 후원을 받는 원당 사찰로서의 지위가 조선 후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선 초기부터 그런 지위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명문의 발견이었다. 특히 이 글자들은 불상에 직접 새겨져있는 1차 자료인지라 그 역사적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계사, 세종 왕실의 후원을 받다파계사가 조선 초기부터 왕실의 후원을 받는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명문은 건칠관음보살상의 밑바닥을 덮은 목판과 불상의 복장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먼저 밑바닥의 목판에 새겨진 명문은 그 대략적인 내용이 복장 유물에서 보이듯이 보살상을 정통(명의 연호, 세종 18년~세종 31년) 12년, 즉 1447년에 중수(일정 규모를 수리 함)하였다고 적혀 있어 결국 이 보살상의 조성연대가 대략 조선왕조시대의 개창 전, 후 정도로 추측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복장 내부에 새겨진 명문인데, 이 명문에는 보살상의 중수에 공력을 얹은 대시주들의 명단이 적혀있는 것이다. 세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영응대군 이염과 신빈 김씨, 그리고 영해군 이장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이렇게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면 문화유산에 숨겨진 뒷이야기를 밝혀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파계사건칠보살상도 마찬가지인지라 이 세 사람의 이름이 세상에 나옴으로 해서 파계사가 조선시대에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왕실의 사람들이 분명한 이 세 사람은 누구였을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영응대군 이염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사이에서 태어난 여덟 명의 왕자 중 막내였다. 익히 알다시피 그의 맏형은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었으며, 둘째 형은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였다. 글씨와 그림, 운율에 뛰어나 세종의 사랑을 받은 막내아들이었지만, 애석하게도 34살의 나이인 1467년에 요절했다. 1434년에 태어난 이염은 8살에 영흥대군에 봉해졌다가 1443년에 역양대군, 다시 1447년, 14살의 나이에 영응대군으로 바뀌었다.
'영약대군 이염을 영응대군으로 삼고, 한확을 판중추원사로, 박종우를 이조판서로, 김윤수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삼았다.' - 세종실록 115권, 세종 29년 3월 10일 임신 1번째 기사(1447년, 명 정통 12년)이염이 영응대군으로 봉해지는 해와 보살상을 수리하는 해는 1447년이었다. 그리고 그 보살상의 대시주의 첫 자리에 이염의 이름이 올랐다는 것은 이 보살상의 중수가 단순히 불상에 시주하는 의미를 넘어서 그가 영응대군으로 봉해진 것을 기념하는 의미가 함께 담겼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짐작을 더욱 확신으로 느끼게 해주는 존재가 바로 이염의 뒤를 대시주로 등장하는 신빈 김씨와 영해군 이장인 것이다.
신빈 김씨는 세종의 세 번째 빈으로 소헌왕후 심씨 다음으로 많은 왕자를 세종과의 사이에서 낳았다. 특히 신빈 김씨는 내자시의 공노비였다가 소헌왕후 심씨의 궁인으로 발탁된 후 세종의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된 경우였다. 실록의 기록에서는 천성이 부드럽고, 매사에 조심스러워 세종의 사랑은 물론이거니와 소헌왕후의 신뢰도 받았다 한다. 일례로 소헌왕후는 막내아들의 유모 역할을 그녀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소의 김씨로 귀인을 삼았다. 애당초에 임금이 도승지 김돈에게 이르기를, "......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양궁을 섬기는 데 오직 근신함으로, 중궁이 매사를 위임하고 막내아들을 기르게 하였으니, 성품이 근신하지 않았다면 중구이 하필 소생 아들을 기르게 하였겠느냐....."' -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1월 27일 병오 2번째 기사(1439년, 명 정통 4년) 영해군 이장은 신빈 김씨가 낳은 여섯 명의 왕자 중, 5번째로 그 출생이 1435년으로 앞에 등장한 영응대군 이염과는 한 살 터울의 이복형제 간이었다. 하지만, 소헌왕후의 신뢰로 신빈 김씨의 품에서 자란 영응대군과 이복형제 간이었지만 한 어머니의 품에서 함께 자란 영해군 이장은 꽤나 돈독한 사이였을 것이며, 이런 세 사람의 인연이 바로 관음보살의 품으로 들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즉, 1447년에 이루어진 파계사관음보살상의 중수는 신빈의 영응대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었으며, 대군으로 봉해진 축하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관음보살, 현세의 안녕 바라는 간절한 기원의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