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놀아보자' 하는 생각으로 즐겁게 살아요."
참여사회
일 이야기는 짧게노는 줄로만 알았는데 생업이 있다는 놀라운 반전으로 시작하는 인터뷰. 그것도 무려 중견업체의 CEO라니!
"엔지니어링 업체예요. 쉽게 말해 토목 분야인데 4대강 같은 거 설계하는 일을 하죠." 팥빙수 한 숟갈을 입에 떠 넣다가 하마터면 제대로 사래가 걸릴 뻔했다. 켁, 켁. 4대강이요?
"예를 들어 한강변을 정비한다 하면 저희 업체에서 현장조사를 하고 어떻게 정비를 할 것인지 설계·검토해서 최종 디자인을 해요. 그 설계를 가지고 시공사가 공사를 하고."
- 그럼 4대강 한창 할 때 돈 좀 버셨겠네요?"그땐 일이 많았죠. 근데 결국 4대강 때문에 토목업체들이 망하게 생겼어요. 일이라는 게 꾸준히 들어와야 먹고사는 건데 4대강 때 왕창 몰아서 하고 나니 이젠 일이 없거든요. 정부가 돈을 다 써버려서 복원공사도 하기 어려울 거예요. 지금 전국의 상하수도관도 전부 교체해야 하는데 수자원공사도 4대강에 돈 다 써서 이거 못하고 있잖아요. 1조면 전국의 웬만한 관(파이프)들은 전부 바꿀 수 있는 돈인데, 참…."
4대강은 단지 4대강 하나만 문제가 아니었다. '녹차 라떼'로 대표되는 자연파괴 문제만도 아니었다. 거대 토목공사가 남긴 폐해들 중엔 알아채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 깨끗한 물을 마실 나의 권리도 있었다. 그나저나 얼굴에 빛이 나는, 일명 '노는 오빠'의 입에서 토목이니 4대강이니 하는 단어들이 나오니 영 기분이 묘하다.
- 사장님이시라 자유롭게 놀러 다니는 거군요."사장이라서 혹은 일이 없어서 그런다기보다 이젠 일이 지겹고 재미가 없어서 그래요."
해서, 재미없고 지겨운 '일 이야기'는 짧게 마친다.
노는 이야기는 길게제대로 놀아보자는 담대한 포부를 품고 사람들이 모였다. 모임의 이름은 '호모루덴스 소셜 클럽.'
"희망제작소의 '퇴근 후 렛츠'란 프로그램에 참가했었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만든 모임이에요. 그 프로그램에서 '호모 루덴스'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제가 노는 거 정말 좋아하거든요, 하하하. 어떻게 하면 꼰대 소리 안 듣고 잘 놀 수 있는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하면서 제대로 노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종의 사회문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죠. 이번에 '50플러스 재단'에서 시민들이 만드는 소모임이나 단체의 설립을 돕기 위한 공모전이 있었는데 저희 단체도 선정되었어요. 현재는 사회적 기업도, 협동조합도 아니지만 계속 정체성에 대해 고민 중입니다."호모루덴스란,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본질은 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보는 인간관이다. 일은 하기 싫고, 놀고만 싶고, 해 보고 싶은 거 천지라는 그가 '루덴스 클럽'의 회장이 된 건, 그러니까 운명이다.
"오늘이 마침 '루덴스 데이'예요. 한 달에 한두 번 만나서 제대로 노는 날이죠. 멤버는 한 20명 쯤 되는데, 4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해요. 인터뷰 끝나고 같이 갈래요?"네에? 전 한 10년 쯤 후에…. 근데 오늘은 뭐 하고 노나요?
"오늘은, 보자, (휴대폰을 꺼낸다) 처음엔 '제대로 건강법', 그 다음엔 스마트폰으로 영상 촬영하는 법에 대해 배우고, 저희 모임에 서울 역사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계시거든요, 그분한테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마지막엔 제가 탱고도 가르쳐줄 거예요. 이 프로그램 모두 저희 모임의 멤버들이 가르쳐주는 거예요."이 엄청난 멤버들을 만난 곳, '퇴근 후 렛츠'는 대체 어떤 프로그램일까?
"사업을 한 지 15년 쯤 되었을 때였는데, 사는 게 더 이상 즐겁지 않고 일상이 답답하기만 하고, 일이 잘 돼도 불안하고 그랬어요. 그때 만난 게 바로 '퇴근 후 렛츠' 프로그램이었어요. 정말 행운이었죠.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거든요."10년 후에도 계속 이렇게 살 것인가, 나는 지금 삶을 즐기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삶은 어떤 것인가….
"답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프로그램이에요. 이 프로그램을 들은 후 회사를 때려치우는 사람들도 꽤 있었죠. 억대 연봉을 받으며 보험회사에 다니던 사람은 결국 직장을 그만 두었어요. 지금은 보험금 제대로 타는 법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고 있죠."관성적으로 흘러가는 나날들을 멈춰 서게 하는 근원적 물음들이 쏟아졌다. 짧고 단순한 질문들은 무감각해진 일상을 예리하게 파고들었고, 굳어진 삶은 그렇게 균열을 일으켰다.
"제가 겪은 가장 큰 변화는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예요. 시민단체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게 되었고 지금도 후원하는 단체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일상도 많이 바꿨죠. 전엔 논다하면 골프 치고 술 마시는 게 전부였는데, 에너지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까 재미있는 '꺼리'들이 많아졌어요. 광화문 집회에도 가고, 박원순 시장 선거 때는 함께 선거캠페인 활동도 하고, 평소 안 해 보던 것들도 배우게 되고, 그러다보니 하고 싶은 것도 엄청 많아지고. 연극도 하고 싶고 그림도 꼭 배워보고 싶어요. 탱고도 '퇴근 후 렛츠'에서 만난 분에게 배운 거예요."'호모루덴스 소셜 클럽'의 회장 정도면, 탱고쯤은 춰줘야 한다, 아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