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민우회·한국여성의전화는 지난 5월 25일 오전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살해된 여성의 추모집회에 참석해 차별과 폭력을 말한 여성들의 사진이나 신상정보가 노출되고 이에 대한 악성 댓글 등이 이어지고 있다"며 주장했다.
최윤석
사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단순히 일베와 같은 특정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벌어지는 혐오발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거대한 구조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 회사,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에 고정하려는 사회 분위기,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여성의 노동 환경, 박탈되는 여성의 승진 기회.
당장 국회의원 숫자만 놓고 보자. 300명 중 여성 의원은 51명이다. 비례대표는 여성과 남성이 절반씩 들어가도록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심지어 17%라는 여성의원 비율은 역대 최고 수치다.
이 폭력적인 사회를 아무렇지 않게 묵시하면서, 메갈리아가 벌이는 폭력만을 못 견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폭력은 나쁘다. 이 단순한 정의를 왜 이 사회에 적용하지 않고, 메갈리아라는 소수 집단에게만 적용하는가.
누군가가 개인에게 벌이는 범죄 행위는, 사법당국과 행정당국의 도움을 받아 처벌하는 것이 '문명적이고' '제도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성적 차별과 대상화에 관해서라면 비문명적이고 야만적이다. 제대로 된 처벌 규정과 제재 방법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 야만적인 사회보다, 저항하는 개인에 주목하는 비열함의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메갈리아의 전략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성평등 실현을 위해 폭력적인 방식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그들이 폭력적이지 않았다면 함께 싸워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것은 가증스럽다. 페미니스트들은 이제까지 수백 년에 걸쳐 그 '폭력적이지 않은 투쟁'을 병행해 왔다. 그들과 함께한 이들이 얼마나 됐던가.
폭력적인 전략으로 '잠재적 우군'을 놓치지 말라는 충고 아닌 충고는 또 얼마나 우스운가. 그 잠재적 우군은 얼마나 잠재적이기에 이 폭력적인 사회에서도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는가. 지금 당장에도 폭력적이지 않게 싸우는 페미니스트들은 많다. 언제 한 번이라도 그들과 연대해본 일 있었는가.
여성에 대한 혐오범죄가 벌어질 때,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사회에서 도태당할 때, 심지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낙태하는 제노사이드가 벌어질 때, "페미니즘이 싫다"며 IS에 가담하는 청년이 등장했을 때. 그 '잠재적 우군'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들은 잠재적 우군인가, 잠재적 적군인가.
이것은 하나의 전략이다. 거대한 폭력에 맞서기 위한 작은 폭력이다. 물론 그 과정과 별개로 존재하는, 아웃팅과 같은 대응적이지 않은 폭력은 반드시 제재되어야 한다. 하지만 메갈리아를 정의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폭력이 아니다. 거대한 여성혐오에 맞서기 위한 저항이 메갈리아를 정의한다.
이 전략에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 역시 이 전략에 크게 동의하는 편은 아니다. 대다수가 사회의 현실을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당연시하는 상황에서, 대중을 '기분 나쁘게' 하는 방식의 운동, 대중에게 '설명해야'하는 방식의 운동은 그 정의로움과 무관하게, 성공의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폭력을 아무런 고찰 없이 단순히 "폭력적인 것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이는 핵심과 맥락을 잃은 비판일 뿐이다. 내가 허락해야만 페미니즘인 것이 아니다. 이들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방식으로 페미니즘과 연대해도 좋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 없이 손가락 끝으로만 "모든 폭력은 나쁘다"고 말하는 일은 오히려 메갈리아 이상으로 폭력적이다.
또한 메갈리아가 이 사회에서 해낸 역할에 대해서도 부정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메갈리아를 통해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차별과 대상화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그랬다. 대한민국에서 남성으로 사는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해 일말도 짐작하지 못했다. "너는 여자니까"와 "너는 남자니까"를 아주 당연하게 믿고 자랐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수많은 압박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지냈다.
아니, 어쩌면 나의 의도적 외면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여자가 아니었더라면"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여성들의 대화를 듣고도 모른척한 나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포기한 꿈과 희망과 열정에 대해 아무런 고찰을 하지 못한 나였다.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혐오가 나에게도 있었다.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으며, '인간'의 기본형으로 '남성'을 당연하게도 생각했다. 성 역할의 구분과 성별의 구분을 당연시하며 살아갔다. 남성과 여성 모두가 그렇게 사는 줄 알았고, 모두가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을 바꿔준 것이 메갈리아였다.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수많은 불쾌한 일들과 억울한 일들, 고통스러운 일들과 힘든 일들. 심지어 '소라넷'과 같은 범죄행위가 아주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메갈리아가 아니라면 몰랐을 것이다.
메갈리아는, 나를 포함해 사회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자각시켰다. 아마 메갈리아를 통해 날개를 편 '미러링'과 각종 '폭력적'인 페미니즘은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을 자각시킬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메갈리아의 전략에 동의하지 못하더라도, 메갈리아가 사회적으로 절대악의 상징처럼 되어버려도, 그렇다면 메갈리아는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메갈리아'에서 나오는 말들에 대해 불쾌하고 짜증 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에 불쾌한 우리는, 과연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고 살았는가? 여성에 대해 남성이 일상적으로 던지는 말들을, 그 대상이 남성이 되었다는 이유로 불쾌하게 느낀 것은 아닌가?
메갈리아가 던지는 의문은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수와 과한 폭력성이 있었더라도, 메갈리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