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명 선생이 말에 탄 채 창의를 호소하여 쓴 <마상격문>으로, 칠백의총 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
칠백의총기념관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6월 1일 기사는 '여러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면서 전국 각지의 창의(倡義) 소식을 전한다. 이날 기사는 전쟁 초기에 조선이 일방적으로 밀린 이유를 '당시 삼도(三道,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장수와 수령들이 모두 인심을 잃은 데다가 변란이 일어난 뒤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밉게 보아 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전쟁 예측 오판과 대비 부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기사는 의병이 일어난 까닭을 '큰 가문과 이름난 인사들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창의하자 사람들이 호응하여 멀리서 가까이서 모여들었다.'라는 문장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기술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로부터 '모든 의병들이 조정의 명을 받고 일어난 것 같이 기술하고 있으나 관군도 조정의 명령에 잘 따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의병장이나 의병들이 조정의 명령에 의하여 봉기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라는 비판에 직면한다.
의병, 한 건 없지만 덕분에 국가 명맥 유지?... 이상한 기록<신편 한국사>는 '경상도에서는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략 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에서는 조정의 명령에 따라서 의병이 조직되기도 하였으나 거의 자발적인 의병의 봉기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실록의 기사는 '(의병이) 크게 이룬 것은 없지만 인심을 얻었기 때문에 국가의 명맥이 그들 덕분에 유지되었다.' 식으로 앞뒤가 완전히 모순되는 표현까지 하고 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의병들 덕분에 나라가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흔히 농담으로 말하는 '먹은 것도 없이 배 부르다' 부류의 잡담인 셈이다.
어쨌든 수정실록은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 호서(湖西, 충청도)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형석의 <임진전란사>에 따르면, 고경명이 의군기(義軍旗, 의병 군대의 깃발)를 높이 세워 군사들을 모으고, 의병장으로 추대된 때는 1592년 5월 29일이었다. (칠백의총 기념관의 <금산 지역 전투도>에는 고경명이 6월에 담양에서 창의했다고 표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