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치는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 사이의 고개이다. 왼쪽 사진은 새로 난 6차선 도로의 경계선이고, 오른쪽 사진은 예전부터 있던 비포장 길의 경계선이다. 오른쪽 사진의 안내판 왼쪽으로 200미터 가량 들어가면 웅치전적비가 나온다.
정만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전라도로 들어가려 했다. 넓은 평야의 곡창 지대를 차지함으로써 군량미 걱정을 해소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바다에서는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 육지에서는 곽재우 등 의병들의 분전에 밀려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일본군 7군사령관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은 당시 한성(서울)에 있던 안국사혜경(安國寺惠瓊, 안코쿠지 에케이)을 남쪽으로 내려보내어 재차 전라도 점령을 시도했다. 전라감사를 자칭한 안국사혜경은 먼저 남원을 점령한 다음 전주로 올라가려 했다. 그래서 창원에 주둔 중이던 별군을 북상시켰지만 의령에서 곽재우 군에게 막혔다.
권종 |
권종(權悰, ?~ 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3월 금산군수로 부임하였다. 당시 광주목사는 권율이었고, 권율은 권종의 사촌동생이었다. 권종은 권율과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국난에 대처할 것을 다짐했다.
일본군이 한성에서 남하하여 전라도로 진격하고 있다는 속보를 들은 권종은 군사를 이끌고 전주에 갔다. 그런데 관찰사는 그가 고령에 무장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군사를 빼앗고, 군량 관리의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일본군이 옥천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조선군은 저절로 무너졌다.
곡식을 나르던 권종은 "왜적이 본도(本道, 전라도)를 침범하려고 하는데 감사와 장수들이 모두 도망가 여러 고을이 텅 비어 사람이 없다. 나는 공무로 여기(전주)에 있으므로 본군(本郡, 금산군)이 왜적에게 함락되더라도 할 말이 있다. 그러나 의리상 본군을 버리고 존망(存亡, 살고죽음)을 같이하지 않을 수 없으니, 나에게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국조인물고>의 표현)"라고 결의를 나타낸 후 금산으로 돌아와 황급히 군사를 모집했다. 그러나 모인 군사들은 2백 명도 채 되지 않았고, 그나마 병약하고 나약한 사람들뿐이었다.
6월 22일 일본군이 금산으로 쳐들어왔다. 권종은 약간의 역졸을 거느리고 있던 제원찰방(濟源察訪) 이극경(李克絅)과 합세하여 적과 싸웠다. 하루 종일 혈전을 벌였지만 워낙 중과부적 상태였으므로 불가항력이었다. 이튿날 권종은 아들 준(晙)과 함께 순국하였다.
권종은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1832년 '충민(忠愍)'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시호는 국왕이 업적이나 학문 등을 참작하여 죽은이에게 내리는 칭호로, 서경(署經, 신하들의 의견을 구함)을 거쳐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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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를 바꾼 안국사혜경의 별군은 군대를 나누어 1군은 성주로 진격했다가, 이어서 지례와 거창을 쳤다. 2군은 황간과 순양(영동군 양산면)을 거쳐 무주로 침입했다. 이들은 모두 금산으로 몰려들었고, 청주를 거쳐 남하한 안국사혜경도 금산으로 왔다.
6월 22일 안국사혜경의 대군을 맞이한 금산군수 권종(權悰)은 이틀에 걸쳐 혈전을 벌였지만 끝내 아들 준(晙)과 함께 순절했다. 이제 금산은 적의 출발지가 되었고, 목적지는 여전히 전주였다. 안국사혜경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1군은 용담과 진안을 거쳐 웅치를 넘어 전주로, 2군은 진산을 친 다음 이치를 넘어 전주로 진입할 작전을 짰다.
이윽고 1592년 7월 8일과 9일, 이틀 동안 '임진전란사에 손꼽히는 대혈전'이 웅치에서 벌어졌다. '임진전란사에 손꼽히는 대혈전'은 웅치 정상에 세워져 있는 <웅치 전적비> 비문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는 1969년에 이 전적비를 건립한 전라북도 측의 '팔은 안으로 굽는다'식 과장일지도 모른다. 웅치 전투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알아보기 위해 믿을 만한 여러 자료들을 읽어본다.
김형석은 <임진전란사>에서 '이 (웅치) 전투는 이치와 같이 완전히 적을 물리치지는 못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뒤에 일본군이 전주성을 역공(力攻, 힘껏 공격)하여 함성(陷城, 성을 함락)할 생각을 버리게 된 것은 이 일전(一戰, 한 번의 큰 전투)에서 조선군의 저항력이 얼마나 강하였고, 사수(死守, 죽음으로써 지킴) 관념이 얼마나 굳었던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았기 때문에 (전주)읍성 공위(攻圍, 포위하여 공격)를 주저한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이 일전의 공이 얼마나 컸던가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도 '웅치에서 안덕원까지 이어진 일련의 전투는 후일에 벌어진 이치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초기 호남 방어에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웅치 전투를 통해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전열을 가다듬어 왜군의 호남 점령 시도를 무산시켰다. 호남 지역의 곡창을 보존함으로써 조선은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는 인적·물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평가한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도 '웅치, 이치, 금산에서의 전투에 의하여 일본군은 열기가 꺾여 전라도 침입을 단념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전라도는 전화를 면하게 되었다.'라고 기술한다. <신편 한국사>는 또 '(1592년) 8, 9월 중에 전개된 공방전에서 가장 큰 성과는 전라도에 쳐들어 온 일본군을 격퇴하여 곡창 호남 지방을 지킨 일이었다.'면서 '이치 전투와 거의 동시에 진안의 웅치에서는 김제군수 정담, 의병장 황박 등이 합세하여 사력을 다해 전투를 하였다.'라고 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