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의 이순신 사당
정만진
의병과 승병도 일어났다. 7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경상도에서 곽재우, 정인홍, 김면, 권응수, 전라도에서 김천일, 고경명, 충청도에서 조헌, 함경도에서 정문부, 황해도에서 이정암, 평안도에서 조호익, 양덕록, 경기도에서 심대, 홍계남 등이 자발적으로 군사를 모아 일본군과 싸웠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 스님 등은 승병을 이끌고 왜란 극복에 앞장섰다. 의병들의 뛰어난 활동은 일본군들로 하여금 전쟁을 포기하고, 그 대신 강화 교섭을 시도하게 만드는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조정은 의주에 머물면서 명나라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다. 8월 24일 정곤수는 명의 병부상서 석성을 만나 지원군을 보내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200년간 명나라에 충성을 다한 조선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한 일(7차 교육과정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표현)'이라는 논리의 파병이었다.
사실 그 이전까지 명은 조선을 믿지 않고 있었다. 전쟁이 터진 지 보름도 되지 않아 수도를 포기하고 압록강 바로 아래까지 임금과 조정이 피란을 거듭한 것부터 이상하게 여겼다. 일본군과 연합하여 명을 공격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 초기 조선 조정을 의심했던 명나라최초의 파병 명군은 요동에 있던 조승훈 부대였다. 그러나 일본군을 가볍게 보고 제대로 준비도 없이 평양성을 공격했던 조승훈 군은 크게 패전했다. 이어 명은 송응창과 이여송이 이끄는 대규모 부대 파견을 결정했다. 1593년 1월 6일, 이여송이 3만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했다. 명나라 대군은 조선군과 협력하여 1월 8일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군은 평양과 개성을 버리고 한성으로 퇴각했다. 자신감에 찬 이여송은 소규모 부대만 이끌고 한성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많은 병력을 한성에 집결시킨 일본군은 명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복병을 깔아두고 있었다. 벽제관에서 일본군 복병을 만나 간신히 목숨만 건진 이여송은 군량 부족을 이유로 개성으로 후퇴했고, 그 뒤로는 전진을 꺼렸다.
일본군은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보급 곤란, 의병의 공격, 수군 참패, 명군과의 전투 등 모든 것들이 어려웠다. 그래서 부산 좌우 바닷가 일대의 점령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병력만 남기고 군대를 일본으로 철수시킨 채, 명과 강화 교섭을 벌이기 시작했다. 명도 일본군의 요동 진입을 막는 데 성공했으므로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