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달력.
김종성
임오군란 핵심은 일방적 시장개방에 대한 반대프랑스 역사에만 코뮌이 있었던 게 아니다. 조선 역사에도 유사한 게 있었다. 이른바 한성코뮌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1882년 7월 23일(음력 6월 9일), 수도 한양을 장악한 시민권력 지도부가 바로 그것이다.
그 해 7월 23일은 임오군란이 발생한 날이다. 음력으로 임오년 6월 9일인 이 날, 조선 수도 한양은 주민과 군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일시적인 무정부 상태에 돌입했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군란'으로 폄하하고 있다. 물론 하급 군인들이 대거 참여한 건 사실이지만, 이것은 한성부 즉 한양 시민들의 대거 참여 속에서 이뤄진 대사건이었다. 차라리 임오'민란'으로 폄하하면 했지, 군란으로 폄하할 일은 아니었다.
임오군란을 두고 우리 사회는 '개항에 반대해서 일어난 보수적·국수적 저항운동'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보수적·국수적 사건이 아니라 도리어 진보적인 시민저항운동이었다.
많은 사람은 개화정책에 대한 불만 때문에 임오군란이 벌어졌다고들 말한다. 개화(開化)는 좋은 말이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개화라고 했으니, 나쁜 말일 수가 없다. 이렇게 좋은 개화에 대해 불만을 품은 세력은 당연히 나쁜 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임오군란은 단순히 새로운 문화에 대한 불만 때문에 촉발된 게 아니었다. 구한말 상황에서 개화의 핵심은 시장개방이었다. 조선의 시장을 일본·미국·청나라·영국·러시아 등에 개방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당시는 조선 기업이 이들 나라에 진출할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 시장을 이 국가들에게 일방적으로 개방하는 것이 개화의 본질이었다.
임오군란은 그런 시장개방으로 촉발된 삶의 질 저하에 대한 저항운동이었다. 시장개방으로 피해를 본 서민대중과 중소 상인들의 봉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서양문화를 거부하는 투쟁이 아니라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서민대중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보수적이니 국수적이니 하고 폄하할 수는 없다. 19세기판 세계화 및 신자유주의에 맞서 민족 생존권을 지키고자 일어난 투쟁에 대해 그런 모욕을 가해서는 안 된다.
갑신정변에 비해 임오군란이 홀대 받는 이유1884년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다. 3일 만에 끝난 사건인데도, 이 사건의 주역과 경과과정에 대한 역사서들의 기술은 꽤 소상한 편이다. 임오군란은 3일 정도가 아니라 무려 1개월간이나 계속됐다. 그런데도 사건을 일으킨 주역은 물론이고 그 1개월 사이에 벌어진 기막힌 일들을 소상히 다룬 글은 별로 없다.
사실은 갑신정변보다 임오군란이 훨씬 더 중대한 사건인데도 이렇게 홀대를 받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 계급 문제 때문이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은 지배층 인물들이다. 그에 비해 임오군란을 일으킨 세력은 나이 60세 김장손을 비롯한 한양의 하층민들이었다.
임오군란 주역들은 한 달 동안 정부를 압박해서 빈부격차 같은 계급 문제를 뜯어고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못 배운 '상것'들이 한 달씩이나 나라를 주물럭거리며 체제를 바꾸려 했다는 점은, 그 후에 지식인들이 이 운동의 의미를 폄하하고 운동의 본질을 축소·은폐하도록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만약 김옥균 같은 양반 특권층 인사가 사건을 일으켰고 무려 한 달씩이나 정국을 주도했다면, 아마도 수많은 지식인들이 달려들어 그 영웅담을 열렬히 서술했을 것이다. 하지만 임오군란 주역들 중에는 그렇게 '스펙' 좋은 인물들이 없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가난한 하층민들이었다. 만약 이들이 최종적인 승리라도 거뒀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못했으니 이들을 조명할 필요가 더욱 더 없었던 것이다.
임오군란은 정부가 하급 군인들에 대한 봉급 지불을 13개월이나 미루다가 고작 1개월치 봉급만 지급한 일에서 촉발됐다. 그 1개월치 봉급으로 받은 쌀 포장을 열어보니, 절반은 겨와 모래였고 나머지 절반은 상당 부분 썩은 상태였다.
군인들한테 쌀이 지급되는 과정에서 부패 관료들이 쌀을 가로챈 뒤 겨와 모래를 집어넣고, 이를 숨기고 포장을 부풀릴 목적으로 물을 붓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창 더운 7월에 쌀가마니에 물을 부었으니 썩을 만도 했다.
정부 고위층을 포함한 상류층은 호의호식하는 속에서 하급 군인들이 그런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군인들은 더욱 더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 같이 못 먹는 상황이 아니라, 누구는 먹고 누구는 못 먹는 상황인지라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이어진 상황은 군인들이 쌀 배급소 직원들을 구타하고, 정부는 그 군인들을 체포하고, 시민들은 구속자 석방을 촉구하고자 시위를 벌이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임오군란이란 대형 사건은 이렇게 해서 발생했다. 사건 전개과정에서 관군 지휘체계를 이탈한 하급 군인들이 일반 시민들과 합세하여 시민군을 형성한 상태에서 이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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