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의총으로 들어가는 외삼문, 그 오른쪽에 선정비 비석군이 보인다.
정만진
1592년 4월 15일, 일본 침략군의 공격을 감당해내지 못해 동래읍성이 함락된다. 동래부사 송상현, 조방장 홍윤관, 양산군수 조영규, 비장 송봉수, 동래교수 노개방과 그의 제자 양조한 그리고 문덕겸,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등이 전투 과정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또 부사의 첩 금섬, 부민 김상과 그를 도운 두 여인 등도 죽음을 맞이한다. 뿐만 아니라, 성내에 있던 모든 부민들까지 이날 목숨을 잃는다. (동래읍성 전투에 대해서는
'왜장들까지 애도 표시한 한 선비의 죽음' 기사 참조)
이때 죽은 이름 없는 부민들을 기리는 무덤이 1731년(영조 7)에 만들어진다. 퇴락한 동래읍성을 고쳐쌓는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남문터 좌우에서 임진왜란의 흔적들을 다수 발굴한다. 이 일이 '임진동래의총(義塚)' 조성의 단초가 되었다.
1731년에 조성된 동래읍성 전투 전몰 무명 용사들의 무덤남문 유적에서는 부서진 창, 화살촉, 적군의 포탄만이 아니라 '순사(殉死)한 이들의 많은 유골이 함께 출토되었다. (동래부사 정언섭은) 그중 형골이 완연한 12구의 유해와 무수한 잔해를 거두어 베와 종이에 싼 후 상자에 넣고, 부의 남쪽 삼성대 서쪽 구릉(내성중학교 부근)에 육총(六塚)으로 모시고, 壬辰戰亡遺骸之塚(임진전망유해지총)이란 비석을 세웠다.'
작은따옴표 안의 내용은 동래의총 내삼문 바로 앞 '임진동래의총 정화 기념비'의 해설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빗돌 제목에 '정화'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부적절한 어휘 사용의 예시로 작문 시간에 거론될 사안이지만, 그래도 해설문 자체는 간결하고 명쾌하여 답사자의 궁금증을 깔끔하게 풀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