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공단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홍살문. 10미터쯤 올라가면 오른쪽 10m에 선정비 군, 위 40m에 당집, 위 50m에 윤공단이 있다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정만진
임진왜란 초기,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선제 공격에 당한 부산 일원 장졸들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전쟁이 터진 지 일곱 달도 더 지난 1592년 11월 25일자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선조와 김수의 '(부산진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헌은 죽었나?', '안 죽었다고도 하지만 죽은 게 분명합니다. 송상헌이 왜적의 장수가 되어 도리어 아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닙니다.' 라는 문답도 그 증거의 하나이다. 그만큼 선조와 대신들은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다대1동 산24번지'와 현지 안내판의 '다대1동 1234번지'는 전혀 다른 곳이다. '다대1동 산24번지'로는 도저히 윤공단을 찾을 수가 없다. 자동차를 몰고 줄곧 방황하던 역사여행자는 답답한 마음에서 '윤공단'을 Tmap에 입력해 본다. 그랬더니 곧장 '윤공단 앞' 지도가 화면에 뜬다. 산 아래가 아니라 대도로변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이 윤공단의 주소를 틀리게 공지한 것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이 윤공단의 주소를 잘못 공지하고 있듯이, 조선 조정도 윤흥신을 비롯한 다대포 장졸들의 장렬한 전사에 대해 그들이 죽고 164년이나 지난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현창하기 시작했다. <부산의 문화재>(부산직할시, 1982)에 따르면, 1761년(영조 37) 경상감사 조엄(趙曮)은 윤흥신의 다대포 전투에 관한 '비교적 자세히 기록된 믿을 만한 문헌(필자 주: 구사맹의 <조망록>을 지칭)을 입수, 조정에 포상을 요청'했다.
윤흥신 기리는 일에 줄곧 노력한 조엄
조엄과 고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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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년(숙종 45)에 태어나 1777년(정조1)에 타계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고구마를 우리나라에 도입한 인물로 특히 유명하다. 풍양(豊壤)조씨인 조엄은 동래부사, 평안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 이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통신사로서 일본을 다녀오면서 견문을 기록한 <해사일기(海槎日記)>가 전해지고 있다.
조엄이 통신정사(通信正使)로서 일본에 다녀온 때는 1763년이다. 그는 대마도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오면서 재배법과 보관법도 알아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이 일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일을 면했다. 그가 해사일기에 '일본인들이 고귀위마(古貴爲麻)라고 부른다'라고 기록한 데 근거하여 그 이후 "고구마"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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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신에 관한 첫 기록은 뒷날 새삼스럽게 쓰여진 <선조수정실록> 1592년 4월 14일자에 등장한다. 실록은 '경상 좌수사 박홍은 바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경주의 왜적이 군대를 나누어 서생포와 다대포를 함락시켰는데, 다대포 첨사 윤흥신이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으니 바닷가의 군현(郡縣)과 진보(鎭堡)들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하여 흩어졌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윤흥신은 비록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기는 했지만 그 이후 잊혀진 인물이 되고 말았다. 조엄의 포상 요청은 다대포 전투의 실상을 세상에 새롭게, 크게 알리는 첫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757년(영조 33), 윤흥신의 순절에 관심이 많았던 조엄은 <다대포첨사 윤공 전망사적서(戰亡事蹟敍)>에도 다대포 전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조엄은 '내가 <징비록>을 본 바에는 다대포첨사 윤흥신이 역전하여 전사하였다고 하고, <재조번방지>에는 왜적이 군사를 나누어 서평을 함락하고 다대포첨사 윤흥신이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피살되었다고 했다.'면서 역사서에 전해지는 윤흥신에 대해 진지하게 언급했다.
이어서 그는 '<징비록>은 선조 조의 정승 류성룡이 지은 것이고, <재조번장지>도 동양위(선조의 부마 신익성) 윤자(대를 이을 아들) 신경이 지은 당시의 문헌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쳤을터이니 믿을 만한 것'이라면서 '본인이 동래부에 부임하여 충렬사에 참배한즉 송상현, 정발만 모셔져 있고, 심지어 향리와 노비까지 제사지내고 있으나 윤공만 제외되어 있어 이상하게 생각했다.'라고 밝혀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