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취임한 안양옥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은 7월 4일 재단 운영 구상을 밝히며 대학생이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는 방법이랍시고 국가장학금 제도의 축소와 '소득 분위에 상관없는 무이자 대출'을 언급했다. "빚이 있어야 '파이팅'을 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연합뉴스
지난 5월 취임한 안양옥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은 7월 4일 재단 운영 구상을 밝히며 대학생이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는 방법이랍시고 국가장학금 제도의 축소와 '소득 분위에 상관없는 무이자 대출'을 언급했다. "빚이 있어야 '파이팅'을 한다"는 말을 덧붙이며. (관련 기사 :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대학생, 빚 있어야 파이팅 해")
아마 채무가 일종의 동기부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이야기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생각은 틀렸다. 채무는 동기부여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을 옭아매는 족쇄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생에게는 더 그렇다. 많은 수의 대학생이 학자금 대출을 못 해도 수백, 많으면 수천만 원까지 가지고 있다. 생활비 대출 등 학자금 외 대출을 가지고 있는 이도 많다. 그들은 채무를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극단적으로는 학업을 포기하거나 미루기도 한다.
교육부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5년까지 학자금대출을 받은 누적 인원은 326만 명 정도이고, 금액은 14조 8천억여 원에 육박한다. 또 반값등록금 실현과 교육공공성 강화를 위한 국민본부는 학자금 대출 채무를 제대로 갚지 못하고 있는 청년이 2015년까지 19만6822명에 이르고 채무를 제때 갚지 못해 소송을 당한 사람은 약 1만1000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학자금 푸어(poor)'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많은 대학생에게 학자금 대출은 동기 부여의 수단이기는커녕 속박이고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등록금은 미래의 내가 내겠지"라는 속 쓰린 농담처럼, 대학생들은 더는 저당 잡힐 것이 없어 '미래'를 학자금에 저당 잡혀가며 공부하고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하지 않으면 일할 기회, 사회에 나가 햇빛을 볼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학비 마련하기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
안 이사장의 이야기는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부모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립심'을 키우는 차원에서, 자신이 대출을 받고 그것을 '스스로' 갚아 나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 스스로 학비를 벌고 빚을 갚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등록금은 말도 안 되게 높고, 그에 비해 수입의 기준선인 최저임금은 턱없이 낮기 때문이다.
한국의 4년제 사립대 중 문과계열 한 학기 등록금은 대략 300만 원대 중반에서 형성되곤 하는데, 최저임금은 2016년 기준 시간당 6030원, 월급(209시간 기준)은 126만270원이다. 이 돈으로 등록금을 부담할 수야 있다. 자취하지 않고 무언가를 먹지도, 핸드폰을 이용하지도, 어딘가로 이동하지도, 책을 사거나 영화를 보지도 않고 오로지 '숨만 쉬고' 산다면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숨만 쉬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때문에 한 시간에 6천 원이 겨우 넘는 아르바이트를 두세 개씩 하고 또 아무리 아끼고 절약해도 절대 '스스로' 빚을 갚아나갈 수는 없다. 요새 젊은이들이 '패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노오력'을 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파이팅'이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고 말이다.
이는 구조적 차원의 문제다. 예컨대 힐러리 미 민주당 대선후보는 최저임금을 15달러(약 1만7300원)로 인상하는 버니 샌더스 예비후보의 공약을 차용했고, 호주는 올해 7월부터 최저임금을 17.7 호주 달러(약 1만5400원)로 인상했다. 힐러리의 정책이야 그렇다 쳐도 호주는 GDP(국내총생산)가 1조 2008억 달러로 세계 13위인 데 반해 최저임금이 세 배 가까이 낮은 한국의 GDP는 1조 3212억으로 11위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1인당 GDP는 호주가 한국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높지만 총 경제 규모로 놓고 보면 호주는 한국과 비슷한 경제 수준이라는 것이다. 또 각국의 상대적 물가 수준과 통화가치를 비교하는 구매력평가지수의 일종인 빅맥지수(Big Mac Index)에서 호주는 3.74달러로 12위, 한국은 3.59 달러로 14위다. 총 경제 규모뿐 아니라 물가 수준과 통화가치에 있어서도 한국과 호주가 비슷한 위치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러한 규모에 비해 호주의 최저임금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한국의 최저임금은 비정상적으로 낮다. 애초에 스스로 벌어 빚을 갚는 '파이팅'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학자금 대출은 많은 수의 '졸업반' 대학생들이 졸업을 미루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한다. 졸업을 하는 순간 당연히 그의 신분은 학생에서 구직자, 즉 백수로 변하게 되고 지난하고 힘든 구직과 대출 상환의 길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이미 졸업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졸업 연기 제도를 있는 대로 활용해라"라는 말을 괜히 하는 것이 아니다.
취업이 잘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학 졸업자가 말 그대로 쏟아져 나오는 판국에서 한국의 취업난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생들이나 구직자들은 학원이나 도서관에서, 인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각자의 이유때문에 햇빛을 볼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한 채 살고 있다. 번듯한 직장에 취업해 햇빛을 볼 기회를 얻기 위해 잿빛의 빚더미에 사는 모순이다.
빚이 증가한 한국은 '파이팅'이 넘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