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샨티
내 하루는 즐거운 삶이 될 수 있을까요? 내 하루는 괴로운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 하루는 어느 쪽으로든 얼마든지 흐를 만하리라 느낍니다.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때문에 즐거운 삶이 될 수 있고, 또는 괴로운 삶이 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어제하고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어제하고 다른 마음'이라면, 어제에는 괴로웠어도 오늘은 즐거울 만합니다. 그리고 이와 거꾸로 '어제하고 다른 마음'이기에, 어제에는 즐거웠어도 오늘은 괴로울 만해요.
날마다 똑같은 일터에 오가야 하는 삶이라 하더라도 '내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늘 달라지지 싶어요. 부산스럽거나 바쁘게 아침을 연다면 일터로 오가는 길에 이 부산스러움하고 바쁜 숨결을 그대로 이어서 괴롭거나 힘들 수 있어요. 차분하면서 고요하게 아침을 연다면 일터로 오가는 길에 차분하면서 고요한 몸짓으로 새로운 즐거움을 일으킬 테고요.
하늘을 보고 날씨 변화의 조짐을 읽는 법이라든지, 성냥 없이 불을 지피는 법, 식물을 키우는 법 같은 지식은 지금껏 접해 본 적이 없었다. (88쪽)정규 교육을 받으면서 내가 뭔가 빠졌다고 느꼈던 것은 바로 나와 인류 사이의 연결성, 나와 생명 사이의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 같은 본질적인 지식이었다. (223쪽)
웬디 제하나라 트레메인 님이 쓴 <좋은 인생 실험실>(샨티, 2016)을 읽어 봅니다. 이 책을 쓴 젊은 두 사람은 미국에서 도시 한복판을 떠나 두멧자락에서 '삶을 손수 짓기'로 누려 보자는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똑같이 '미국에서' 이처럼 도시를 떠나 두멧자락에서 수수한 삶을 손수 지으려 했던 이들이 있었지요. 이를테면 헨리 데이빗 소로우 님이 니어링 부부가 있어요. 이들은 어수선하거나 어지러운 도시에서 늘 똑같은 하루가 흐르는 모습이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여겼어요. 스스로 도시를 떠났고 스스로 시골에 깃들었으며 스스로 모든 살림을 지었어요.
스스로 모든 살림을 손수 짓는다고 할 적에는 '돈을 벌'지 않습니다. '살림을 짓'습니다. 살림을 스스로 짓기에 굳이 '돈을 벌어서 이 돈으로 살림을 장만해'야 하지 않아요. 돈을 버는 살림이 되면 '내가 벌어들인 돈으로 살림을 장만해야 하는 흐름'이 되지요.
<좋은 인생 실험실>을 쓰기까지 퍽 오랫동안 미국 두멧자락에서 '손수 살림을 짓자'는 마음으로 살던 두 사람은 '빈틈없는 자급자족'까지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스스로 즐겁게 이루는 살림'이 되는 길을 걸으려 했다고 합니다.
해 보지도 않고 "나는 못해" 하던 마음가짐을 어떻게든 해나가면서 계속 뛰어넘었다. 우리는 실수를 했고, 그래서 더 좋게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히 괜찮은 것들을 계속 만들었다.(121쪽)지식은 머리만으론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식은 가슴을 통해서 얻는 것이며, 또 지혜의 원천인 생명에 다시 연결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다. (227쪽)
<좋은 인생 실험실>을 쓴 두 사람은 수수하게 털어놓습니다. 이제껏 기나긴 해를 들여 학교를 다녔지만 '살림짓기'를 배운 적이 없다고 해요. 학교를 아무리 오래 다니고 책을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날씨읽기'나 '흙읽기'를 배우지 못했다고 해요.
이리하여 처음부터 모든 것을 몽땅 손수 짓겠다는 생각을 품지 않습니다. 하나씩 차근차근 이녁 길을 걸으려 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즐겁게 하기로 합니다. 하다가 잘못된다면 잘못된 대로 새롭게 배우면서 이대로 즐거운 살림을 누리기로 합니다.
흙을 만지면서 씨앗을 심을 적에도 이와 같아요. 어느 씨앗은 싹이 안 틀 수 있어요. 싹이 잘 터서 자라다가 그만 바람에 뚝 끊어질 수 있어요. 풀을 뽑다가 그만 '내가 심은 아이'를 뽑을 수 있어요. 저도 어제 밭에서 풀을 뽑다가 당근싹 하나를 잡아당기고 말았습니다. 비바람에 드러누운 옥수수를 세운다고 하다가 그만 옥수수 자루 하나를 끊고 말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