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구름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란드룩 마을.
송성영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구름이 내려 앉기 시작하고 멀쩡한 사위가 어두워져 가더니 이슬비가 내린다. 게스트하우스 아가씨 말대로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린다는 몬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양이다. 풀밭에 쓰러져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외톨이 조랑말이 빗줄기에 정신이 번쩍 드는지 몸을 벌떡 일으켜 풀을 뜯는다.
본능적으로 풀을 뜯고 있는 녀석을 보다가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 한다.'는 시 구절을 떠올린다. 조랑말은 '비가 온다. 살아야 한다.'라는 의지로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다. 등짐을 지려면 먹어야 한다. 비가 오지 않아도 살아야 한다.
녀석은 뱃가죽이며 발굽에 피멍이 아물기도 전에 죽지 않을 만큼의 등짐을 지고 또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짐을 질 수 없는 낙오자에게는 죽음뿐이라는 사실 또한 직감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가는 이슬비를 맞아가며 뒤늦게 풀을 뜯고 있는 외톨이 조랑말을 보면서 란드룩 '헝그리 아이 게스트하우스'에 얼마나 더 머물러야 할 것인지를 생각한다. 답이 없다. 외톨이 조랑말의 방울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른 동료들은 멍청히 서서 꿈벅꿈벅 무거운 눈꺼풀로 우물우물 되새김질 하고 있는데 상처 많은 외톨이 조랑말은 혼자서 달랑달랑 방울소리를 내며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문득 조랑말들이 자유롭게 풀밭에 풀려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산비탈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하는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 도망칠 수 있는 기회다. 그럼에도 그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원을 자유롭게 누비고 다니는 말의 본성이 퇴화된 것일까. 무엇이 저 조랑말들의 본성을 길들여 고통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한 것일까.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와 저 조랑말들과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나는 조금씩 굵어져 가는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종종 빗줄기를 타고 올라 머나 먼 전생의 동굴로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은 가장 안락한 공간이다. 나는 그 동굴 속에 앉아 있다.
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설산에서 녹아내린 물 한 방울이 바다와 이어져 있고,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앞바다와 이어져 있듯이 빗방울은 까마득한 원시 동굴과 맞닿아 있다는 상상을 한다.
원시 시대에는 동물이든 인류든 비를 피할 수 있는 동굴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동굴은 비가 오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이 되었을 것이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을 것이다.
동굴은 인류의 가장 소박한 생활공간이다. 인류가 생존에 꼭 필요한 것들만 소유했을 동굴의 소박한 삶의 형태와 일찍이 깨달음을 성취한 성인들의 정신을 결합한 삶을 살아왔다면 현재의 인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생명을 함부로 해가며 서로 증오하고 싸우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갈 무시무시한 살상무기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인류는 진화를 거듭할수록 그에 따른 욕망 또한 잔혹하게 진화되어 왔다. 정신 또한 사랑과 자비의 화신인 수많은 성인들의 깨달음을 통해 진화되어 왔다. 진화된 정신으로 잔혹한 욕망을 거둬낼 수 있다면 지금처럼 생명이 생명을 길들여 다스리고 부리고 억압하고 죽이는 끔찍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조랑말들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사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