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대전형무소 터에 조성된 인민군에 의한 희생자 추모비
심규상
1950년 6월 당시 대전의 인구는 13만이었다.
6월 25일. 북한의 탱크와 대포가 일제히 38선을 넘었다. 이틀 뒤인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탈출, 몰래 대전으로 피신했다.
이날 충남도지사 관사에 머문 이승만은 대전방송국 방송과장을 불렀다. 이승만은 현관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 이어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기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충남도지사 관사에서 녹음된 이승만의 방송요지는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하고 서울을 방어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자신과 함께 서울을 사수하자'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누가 물어도 대전에서 방송한다고 말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통령과 함께 서울을 지키자'는 호소를 믿고 피난을 포기했던 서울시민들은 28일 새벽 한강 다리가 끊기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대통령이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도주한 것을 가장 먼저 안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국회의원과 내무부장관, 법무부 장관 등 정부 각료, 고급관리, 재계인사, 별을 단 장군, 그들의 가족이었다. 정부 각료들은 한강 다리가 끊기기 전 이승만이 내려온 길을 따라 대전에 속속 도착했다.
이들은 부지 3000평에 건평이 2백 평 남짓한 대전 시내에 있는 성남장 여관에 머물렀다. 이곳에만 약 300여 명이 몰려들었다. 이들의 생활은 전쟁과 무관해 보였다.
"뜰에는 그 사람들이 타고 온 자동차가 80대 이상이나 주차돼 있었고 그중에는 가재도구부터 개까지 끌고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식사용 쌀이 하루 다섯 가마나 필요했고 반찬만도 큰일이었습니다. 이 중에는 '이것은 맛이 없다, 다른 반찬을 더 내라'며 귀찮게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하루라도 빨리 더 안전한 곳으로 가려고 수소문하기만 했습니다." ('성남장' 주인 김금덕씨 증언,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1권, 1983년)
충남도청은 임시 중앙청 건물로 사용됐다. 도청의 각 국장실은 장관실이 됐다. 충남도청 회의실은 국회의사당 역할을 했다. 7월 1일과 4일 각각 임시국회가 소집됐지만 두 번 모두 과반을 채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