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 초롱초롱한 네팔 아이가 받아내는 물줄기가 성수처럼 느껴져 '생수를 사서 먹어라'는 여행 안내서를 어기고 벌컥벌컥 그 물을 마셨다.
송성영
란드룩에서 둘째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 평소처럼 아침 겸 점심을 간단하게 마치고 게스트하우스를 빠져 나왔다. 한 아이가 란드룩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한 수돗가에서 작은 청동 항아리를 씻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나마스테' 인사를 건네자 빙그레 웃는다.
아이는 청결하게 씻은 청동 항아리에 물을 담는다. 마치 성수라도 담아내듯 정성스럽다. 작은 항아리로 쏟아져 내리는 맑은 물이 초롱초롱한 아이의 눈빛을 닮았다.
"이 물 먹어도 되니?"내가 물 마시는 시늉을 하며 아이에게 물었더니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항아리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힐긋힐긋 쳐다본다. 내가 함박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자 부끄러운지 히죽 웃는다. 아이가 저만치 골목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수도꼭지를 틀어 손을 대 본다. 차갑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줄기에 입을 댄다. '자칫하면 배탈이 날 수 있다'는 생각을 접어 두고 벌컥벌컥 마신다. 란드룩에 오기 전 톨카에서 마신 물 때문에 배가 살살 아파왔지만 반나절 만에 잠잠해졌다. 인도나 네팔의 도심에서 석회질 성분이 많은 물을 잘못 마셨다가는 큰일을 치룰 수도 있지만 여기는 청정한 히말라야 기슭이 아니던가.
반드시 생수를 사서 마시라는 여행 경고장을 어기고 내 몸을 믿고 싶어졌다. 북인도 코사니의 시골 의사가 수술대에 올라야 될지도 모른다 했던 다친 무릎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처음에는 도무지 걷지 못할 것만 같았지만 1개월도 채 안돼서 어제 톨카에서부터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1시간 거리를 걷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인도를 거쳐 이곳 네팔에 오기까지 3개월 동안 낯선 사람들이 친절하게 건네는 음식을 입에 대지 말라는 경고장을 수없이 어겨왔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두려움은 내 스스로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형체 없는 귀신과 다름없다. 두려움은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다. 여행길도 마찬가지다. 낯선 것에 대한 경이로움을 만끽하기 보다는 두려움에 휩쓸려 여행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홀로 떠나는 여행길은 익숙한 것들로부터 결별하고 낯선 것들과의 끊임없는 만남이다.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면 병든 몸과 마음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이 내 오랜 믿음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 성수처럼 다가왔던 물을 마시기 전에 망설였다. 두려움으로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었다. 낯선 나라를 홀로 떠돌아다니는 것은 내 오랜 믿음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다.
두려움에 휩쓸려 여행을 망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