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국제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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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이 잔혹하고 비인도적이며,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음은 일찍이 근대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논파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탈리아 출신의 고전 법이론가 체사레 베카리아 였습니다.
그는 "똑같이 두 무고한 자 혹은 두 범죄자 중에서 억세고 용기 있는 자는 그 혐의를 벗게 되고, 나약하고 겁 많은 자는 유죄가 선고될 것이다", "형이 선고되기 전에는 누구도 유죄라고 할 수 없다, 범죄사실이 확실하다면 고문은 불필요하고, 불확실하다면 법률에 따라 무고한 자로 간주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몽테스키외도 그의 저작 <법의 정신>에서 "고문은 전제정에서나 적합한 관행이며, 강압적 자백이 아닌 신중한 수사만이 범죄자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국제사회는 고문금지에 관한 국제규범을 만들게 됩니다. '세계인권선언'(1948),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1966), '만인에 대한 고문과 잔혹하고 비인도적 혹은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 금지에 관한 UN선언'(1975), '고문과 그밖의 잔혹한, 비인도적인 또는 굴욕적인 대우나 처벌의 방지에 관한 UN협약'(1984), '이스탄불 의정서'(1999) 등 고문의 근절을 위한 국제적 노력은 계속되어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이미 갑오개혁(1894) 당시 고문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고, 오늘날 우리 헌법 제12조에도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과연 이 고상한 선언들로, 고문은 전근대의 유물로 사라진 것일까요?
국제엠네스티 "세계 150개국에서 고문 사용 중"몇 해 전 국제엠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는 "세계 150개국 이상에서 고문이 사용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고, 그중 70개 이상 국가에서는 광범위하게, 그리고 80개 나라에서는 고문에 의한 사망자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고문은 그 특성 상 외부로 그 진상이 자세히 드러나기 쉽지 않습니다. 드러난 사례가 이러하다면 은폐된 고문은 보다 광범위하게 자행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무리가 없습니다.
물고문은 얼굴에 수건이나 헝겊을 덮고 그 위에 물을 지속적으로 부음으로써 질식할 것 같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는 고문 방법입니다. 미국 CIA는 2002년 9.11 테러 발생 후 체포된 3명의 알케에다 용의자들에게 이 물고문을 여러 차례 실행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직접 물고문 실행을 승인했습니다. 대부분의 공화당 의원, 부시 행정부 각료들, 전직 CIA 국장들, 딕 체니 부통령 등도 "테러범을 잡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 "완전히, 전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행위"라며 CIA를 옹호했습니다. 미국이 적어도 자국 영토 내에서 물고문을 금지한 것은 2009년 오바마 대통령에 와서 이루어졌습니다. 자국 영토 내에서 라는 전제가 매우 위험스러워 보입니다만.
우리나라는 고문에 관한 한 매우 독특한 역사적 유례를 가진 나라입니다. 갑오개혁이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고 말았듯이, 갑오년 이후에도 식민지 백성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제의 잔혹한 고문은 비일비재 했습니다.
일제 하 고문이 더욱 잔혹했던 것은 '조선인의 손으로 조선인들을' 고문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정보, 사찰, 공작을 담당했던 조선인 고등계 형사들은 고문 기술자들이었습니다. 노덕술, 최연, 김태선, 김태석, 김영호, 이구범, 노주봉, 김창룡 등이 일제하에서 악명을 떨친 친일 고등계 형사, 헌병들이었습니다.
해방 후 이들 친일 고등계 '순사'들은 미군정 하에서 다시 경찰로 복귀하여 한국 경찰의 중추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으로서는 반대파를 숙청하는데 고등계 순사들의 탁월한 정보, 고문, 공작 능력이 더없이 요긴했고, 고등계 출신 세력들은 생존을 위해 권력의 보호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친일 경찰들 일부는 이후 특무대, 방첩부대를 거쳐 군대로 스며들기도 합니다. 1949년 6월 6일 새벽 일제 고등계 출신 세력들이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데 극적으로 성공하면서 일제하 고문기술자들은 완벽하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수많은 고문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1948년 수도경찰청 고문치사사건, 1951년 한양대 박창건 교수 고문치사사건, 1952년 전남 무안경찰서 성고문 사건, 1953년 조봉암 선거운동원 김성주 살해사건, 1958년 조봉암 사건, 1964년 인혁당 사건, 1968년 해방전략당 사건, 납북어부 사건, 1971년 서승 서준식 형제 사건, 1973년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사건,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1975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조작사건,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사건,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1982년 학림, 부림, 송씨 일가 사건, 1983년 오송회 함주명씨 사건, 1985년 김근태 민청련 의장 고문사건, 1986년 부천서 문귀동 성고문 사건,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1989년 미술인 홍성담 고문사건 등.
1990년대 군부 집권세력이 물러나면서 확실히 고문조작 의혹사건들은 줄어들었습니다. 대신 과거 고문피해 사건 재조사, 진실규명, 피해자 치유지원을 위한 활동이 확산되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기 설립된 각종 과거사규명기구들이 고문 등 인권침해사건을 파헤쳤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이어지면서 과거 고문 등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잠들 때, 고문의 망령은 부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