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제일중학교 자리는 본래 대구의 중심부에 솟은 연구산의 정상부였다. 대구에 불이 자주 나자 사람들은 이곳에 커다란 바위 형상의 돌을 놓으면 대구의 불기운을 억누를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바위는 제일중학교 본관 앞에 놓여 있다.
정만진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지만, 오늘날에도 제일중학교 옥상에 오르면 대구 시내 전경을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다. '옥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일제의 침략 야욕에 밀려 연구산 정상부가 납작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본래 조선 시대까지의 연구산은 대구 중심부 일원에서 독야청청으로 불쑥 솟구친 산봉우리여서 전망을 즐기기에 아주 제격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조선 시대의 연구산은 꼭대기가 뾰족했다. 그래서 당대의 문장가 서거정(徐居正)은 따뜻한 아지랑이가 폴폴 솟아오르는 봄철 어느 날 연구산 꼭대기에 올라 '구수춘운(龜峀春雲)'이라는 시를 읊조렸다. 구수춘운은 '거북산 봄 구름'이라는 뜻이다.
龜岑隱隱似鰲岑 거북뫼 아득하여 자라산을 닮았고雲出無心赤有心 산에서 나오는 구름 무심한 듯 유심하네大地生靈方有望 대지의 생명들이 살아나기를 모두가 바라노니可能無意作甘霖 가뭄에 단비를 내려주려 하심이라네시의 전체적 의미는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하늘이 나서서 구원해 달라는 것이다.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다. 서거정은 왜 다른 곳 아닌 연구산에 올라 이같은 소망을 노래했을까? 답은 자명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듯이, 옛날 대구 사람들은 연구산을 대구를 지켜주는 진산(鎭山)으로 숭배했다.
연구산 정상부에 길이 170cm, 폭 120cm, 높이 60cm, 무게 2t 가량의 화강암으로 된 거북바위가 놓인 것도 그래서였다. 즉, 연구산 거북바위는 태초부터 그곳에 존재했던 자연산이 아니다. 대구 사람들이 민속신앙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가져다 놓은 물건이다.
불기운을 누르려고 연구산 정상에 거북바위 설치이에 대해서는 15세기에 편찬된 <경상도 지리지> 등에 증언이 실려 있다. 큰 불이 자주 발생하는 데 두려움을 느낀 대구 주민들이 연구산에 거북 모양의 바위를 얹어놓았고, 그 이후로는 대형 화재가 줄어들었다는 내용이다. 옛날 사람들은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서 깊은 바다에서 사는 거북을 불을 제압하는 상징으로 숭상했다.
따라서 대구의 진산에 대구를 대표하는 서원이 들어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구 사람들이 구암서원을 세운 것은 서침(徐沉)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정몽주의 제자인 서침은 여러 벼슬을 역임한 성리학자인데, 그가 특히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깊은 마음씨의 소산이었다.
지금 대구의 달성공원 일대는 고려 중엽 이래 달성서씨 문중 소유지였다. 세종이 서침에게 '(달벌성이 축조된 서기 261년 이래 줄곧 대구 지역의 요새 역할을 해온) 달성 일원의 땅을 나라에서 군사용으로 사용하고자 한다'면서 '그 대신 다른 땅을 주고, 후손들에게 대대로 벼슬을 내리겠노라' 하고 제안했다. 서침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며, 다만 대구 사람들의 환곡(還穀, 정부로부터 꾼 곡식) 이자를 경감해 주십시오' 하고 흔쾌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