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우호관의 김충선 초상
추연창
우록리 일원에는 사슴 이야기 전설도 남아 있다. 우록마을 뒤편 최정산 중턱의 남지장사 앞길에 흰 사슴이 나타났다는 설화이다. 때는 사명대사가 이 절에서 승려들을 군사 훈련을 시켰던 임진왜란 7년전쟁 중으로, 하루는 대사가 승병들과 함께 무예를 수련하느라 여념이 없는 중에 하얀(白) 사슴(鹿)이 나타났다. 그 이후 우록리에서 남지장사 사이에 있는 동네에는 백록(白鹿)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하얀 사슴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김충선이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은 1600년,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였다. 그 이전까지 김충선은 전쟁터에서 살았다. 녹동서원 옆에 설립되어 있는 '한일 우호관'의 게시물을 보면 김충선은 경주, 울산 등지의 전투에 참가하여 왜군을 물리치는 데 특출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특히 조총 제작 기술과 사용법을 조선에 전수했다. 그는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에도 일급 장수로 활약했다. 이렇게 두루 무공을 세운 그를 사람들은 왜란, 이괄의 난, 호란에 모두 공을 세운 공신이라는 뜻에서 "삼란공신(三亂功臣)"이라 불렀다.
"삼란공신" 칭호를 얻은 김충선 도원수 권율 등이 김충선, 아니 당시까지는 사야가(沙也加)였던 그에게 큰 상을 주어야 한다고 선조에게 주청했다. 선조는 사야가가 조선군 장수로 큰 공을 세운 것은 "바다를 건너온 모래(沙)를 걸러 금(金)을 얻은 격"이라면서 '김해 김(金)씨'를 성으로 삼고, 충성스럽고 착한 인물이니 이름은 '충선(忠善)'으로 하라고 분부했다.
그 이후 김충선의 후손들은 임금으로부터 받은(賜) 김씨 성(姓)이라 하여 스스로를 "사성김씨(賜姓金氏)"라 부르고 있다. 김충선은 임금으로부터 높은 벼슬과 성씨, 이름을 받은 감동을 "자헌계(姿憲階) 사성명(賜姓名)이 일시에 특강(特降)하니 / 어와 성은(聖恩)니야 깁기도 망극다. / 이 몸 가리된들 이 은혜 갑플소냐!" 하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자헌대부라는 높은 품계와 성명을 한꺼번에 특별히 하사하시니 / 아, 임금의 은혜는 깊고도 끝이 없도다. / 이 몸이 가루가 되도록 애쓴들 어찌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으랴! " 라는 뜻이다.
김충선의 시조는 문학 작품으로서의 수준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자신의 감동만은 잘 나타내고 있다. 김수로왕과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오랜 전통의 명문 거족인 김해김씨의 성을 쓰게 하고, 높은 벼슬까지 주었으니 사야가로서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