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에 이렇게 깊은 뜻이

[중국의 고대문화 들여다보기 ⑩] 비림박물관 1

등록 2016.06.14 16:20수정 2016.06.1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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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림박물관
비림박물관이상기

비림박물관은 서안 성벽 남소문인 문창문(文昌門) 안쪽에 있는 비석박물관이다. 비림박물관의 시작은 당나라 말기인 90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비석들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해 이들을 문묘로 옮기면서부터다. 북송(北宋) 말기인 1087년 조운사(漕運使)였던 여대충이 상서성에 있던 개성석경비를 보호하기 위한 공간을 문묘 북쪽에 마련하면서 현재의 박물관이 시작되었다. 1090년에는 석대효경비를 위한 정자(碑亭)와 진열실을 연결하는 통로가 만들어졌다.

이후 구양순(歐陽詢), 저수량(褚遂良), 안진경(顔眞卿) 등 당대 최고 서법가의 작품이 이곳에 모이게 되었다. 이들 비석이 모이자 전시실이 계속 늘어 모두 7개가 되었다. 비림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청나라 초다. 현재 비림은 맨 앞의 효경정(孝經亭)과 그 뒤의 7실(七室)로 이루어져 있다. 1961년 비림은 전국 제일 중점문물보호단위가 되었고, 1963년 효경정 서쪽에 서안 석각예술실(石刻藝術室)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곳 석각예술실에는 능묘석각과 종교석각 9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한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 작품이다.


 말 화상석
말 화상석이상기

능묘석각은 능의 바깥에 설치된 석물, 능안에 들어 있는 석관과 묘지, 화상석(畵像石) 등을 말한다. 화상석이란 석실이나 석관에 그려진 그림으로, 묘주(墓主), 천문과 지리. 생활과 풍속, 귀신과 자연 등을 묘사했다. 종교석각은 불상과 비석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불교가 숭상되던 북위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작품이 많다. 능묘석각과 종교석각 외에 전마장 등 실용적인 용도의 석각예술품도 일부 있다.

1992년부터 서안 비림박물관이라는 이름이 공식 사용되었고, 중국에서 고대비석을 가장 많이 보유한 박물관이 되었다. 가장 오래된 비석은 동한(東漢) 영제(靈帝) 때인 185년 합양(郃陽)현령 조전의 업적을 기려 세운 조전비(曹全碑)다. 그리고 진시황의 문자통일 후 이사(李斯)가 쓴 역산비(嶧山碑)를 모사해 송나라 때인 993년에 새겨 세운 역산각석이 의미 있다. 이곳에 있는 비석 중 유명한 것은 대개 당나라 시대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비석이 석대효경비, 개성석경비, 대진경교유행중국비다.

석대효경비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석대효경비
석대효경비이상기

석대효경비(石臺孝經碑)는 당 현종 때인 745년 만들어졌다. 효경은 인륜도덕과 관련이 있으면서도 유교 경전 중 가장 짧아 당시 가장 많이 읽혔다. 모름지기 효의 출발은 부모를 섬기는 것이고, 중간은 임금을 섬기는 것이고, 그 마지막은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효는 도덕의 기본일 뿐 아니라 충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역대 황제들이 통치이념으로 삼기도 했다.

그 때문에 당 현종도 효경에 서문을 쓰고 주석을 가해 이처럼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이다. 석대효경은 3층으로 된 돌받침(石臺) 위에 6.2m의 비신을 얹고, 그 위에 2층의 영지운문(靈芝雲紋) 화관(花冠)을 옥개석으로 올렸다. 화관의 아랫단에는 당시 황태자였던 이형용(李亨用)이 쓴 '대당개원천보성문신무황제주효경대(大唐開元天寶聖文神武皇帝注孝經臺)'라는 전액이 걸려 있다. 비석은 폭이 1.2m의 4면비로, 효가 치국의 근본이고 백성이 따라야 할 준칙임을 밝히고 있다.


 석대효경비 전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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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현종의 어주효경이 널리 읽히게 되었다. 서문에서 현종은 '효라는 것이 덕의 근본인지라, 모든 가르침이 그로부터 생겨난다. 그래서 친히 주를 달아 가르치니 장래에 그 모범을 따르라'고 했다. 제1장인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서는 효의 시작과 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 자주 들어 알고 있는 효의 개념이다.

"우리의 몸과 터럭 그리고 피부는 모두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니 감히 훼손하거나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바로 세우고 바른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


 개성석경
개성석경이상기

이처럼 돌에 경전을 새겨 비석으로 세우는 것은 중국의 오랜 전통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한 것은 후한 영제(168~189) 때였다. 175년(희평 4년) 유교 경전을 돌에 새기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183년(광화 6년) 완성되어 희평석경(熹平石經)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국책사업은 이후로도 여섯 번이나 더 일어났으니 당나라 때 개성석경, 송나라 때 소흥석경(紹興石經), 청나라 때 건륭석경(乾隆石經)이 유명하다.

개성석경은 당나라 문종 때인 837년(개성 2년) 완성되어 국자감 안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904년 소종(昭宗) 때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면서 장안성이 축소되어 국자감이 성밖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래서 909년 개성석경을 성내인 상서성 서쪽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송나라 때인 1087년 여대충이 개성석경을 문묘의 북쪽으로 이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개성석경이 비림 제1실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12부 유가경전 모두를 114개 돌에 새겨 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성석경 세부 내용
개성석경 세부 내용이상기

그리고 청나라 때인 1664년(강희 4년) 그동안 불온서적으로 여겨지던 <맹자(孟子)>가 추가로 새겨져 모두 13부 경전이 되었다. 개성석경은 7차례 제작된 석경 중 내용이 가장 완벽하고 보존상태가 좋아 학자와 선비들에게 원전(原典, Canon)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오고 있다. 그 때문에 책의 원본으로 또 과거 시험을 위한 교재로 탁본해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개성석경은 유교문화의 원전이고, 중국문명의 원천으로 그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는 또 어떤 의미가?

 휘복사비
휘복사비이상기

당나라 시대 가장 대우받은 학문은 유교고, 가장 번성한 종교는 불교다. 그러므로 이곳 비림 박물관에는 유교, 불교와 관련된 비석이 가장 많다. 앞에 언급한 석대효경과 개성석경은 유교경전을 새기거나 풀어쓴 비석이다. 불교 비석으로는 북위시대인 488년에 세운 휘복사비(暉福寺碑), 당나라 때인 663년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752년 세운 다보탑감응비(多寶塔感應碑)가 오래된 것이다.

대당삼장성교서비는 당 태종 이세민이 서문을 찬하고, 고종인 이치(李治)가 본문을 찬했으며, 글씨는 저수량이 해서체로 썼다. 이것은 원래 대려현(大荔縣)에 있었으나 1972년 비림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대안탑에 있는 안탑성교서비와 함께  현장법사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다보탑감응비는 전액을 서호가 예서체로, 본문을 안진경이 해서체로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 비는 천복사(千福寺) 다보탑을 중수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이상기

이들과는 성격이 다른 비석이 대진경교유행중국비다. 기독교의 한 유파인 경교가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음을 알리는 비이다. 당나라 대종 때인 781년 장안 근교 대진사에 세워졌다. 여기서 대진은 동로마의 한자식 표기다. 그러므로 경교는 동방정교의 일파인 가톨릭 성사도교회(聖使徒敎會, The Holy Apostolic Catholic Church)로 볼 수 있다. 일명 동방정통교회 또는 아술(亞述)동방교회로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아술은 앗시리아(Assyria)의 한자식 표기다.

비문에 따르면 당 태종 때인 635년 동방정통교회의 주교인 아라본(阿羅本: Alopen Abraham)이 교도들을 이끌고 하서주랑을 통해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들어온다. 그들 일행은 태종을 알현하고 기독교의 전교를 요청한다. 황제의 허락으로 638년에는 장안 의령방(義寧坊)에 대진사라는 교당이 세워진다. 그는 또한 바이블을 중국어로 번역 <존경(尊經)>을 펴내기도 했다. 아라본은 고종으로부터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라는 칭호도 받는다. 그리고 덕종(779~805) 때 그 세력을 더 넓히고 번성한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전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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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세워진 것이 대진경교유행중국비다. 그러나 무종 때인 845년 종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회창법난이 일어나면서 경교는 점차 쇠퇴하게 된다. 그 결과 이 비석도 땅에 묻히게 되었고, 천주교가 중국에 다시 받아들여지는 명나라 때인 1622년 발견되어 금승사(金勝寺)에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907년 비림으로 이전 전시되고 있다. 그 결과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동서의 문명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로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이 비문을 찬한 총주교 경정(景淨)은 다음과 같은 사(詞)를 남겼다. 이곳에서 그는 천주를 찬송하고, 태종 문황제의 공덕을 찬양한다. 

"천주는 으뜸 중 으뜸으로 깊고 고요하며 영원하도다. 세상을 끌어안아 교화하고 땅을 일으키고 하늘을 세웠도다. 자신의 분신을 이 땅으로 보내시어 세상을 구원하심이 끝이 없도다. 태양이 떠오르니 어둠이 사라지고 현묘한 진리를 널리 증거하도다.

 태종 문황제
태종 문황제 이상기

문황제의 업적이 높아 전왕을 능가하도다. 때에 맞게 난을 평정하고 하늘과 땅을 넓히셨도다. 광명한 경교를 우리 당에 들어오게 하시고 경전을 번역하고 사원을 세우게 했도다. 노아의 방주를 항해하게 하니 백복이 이루어지고 만방이 편안해지도다.

真主元元 湛寂常然, 㩲輿匠化 起地立天, 分身出代 救度無邊, 日昇暗滅 咸證眞玄, 赫赫文皇 道冠前王, 乘時撥亂 𠃵廓坤張, 明明景敎 言歸我唐 翻經建寺, 存歿舟航 百福偕作 萬邦之康."
#비림박물관 #문묘 #석대효경비 #개성석경 #대진경교유행중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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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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