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뒷문을 열고 앞을 바라보면 건설 중인 혁신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정만진
동호서당이 황경림 의병장을 기려 세워진 집이므로, 의병장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아야겠다. 경산문화원이 펴낸 <경산의 산하>는 1592년 4월 25일에 왜적 100여 명이 와평, 지금의 와촌마을로 들이닥쳐 닥치는 대로 민가를 약탈하였는데, 신해 의병대장 등 하양 지역의 의병들은 악전고투 끝에 적들을 격퇴, 영천 경계까지 맹렬히 추격했다고 전한다. 그날 의병들은 장창 35자루, 조총 25자루, 백납으로 도금한 나무칼 여러 자루, 사람의 눈을 현혹시킬 수 있는 이상한 장식을 한 병기들을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았다.
4월 27일, 경산의 최대기 의병장이 하양 의병진에 합류한다. 이 무렵 최동보 의병장은 (대구 동구) 해안과 (연경서원이 있던) 화담 사이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다. 그런데 4월 30일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용궁현감 우복룡이 아군을 몰살시킨 사건으로, 이곳에서는 생략.
'의병들 반란군으로 몰아 학살한 사건, 사실일까?' 기사 참조)
5월 2일, 하양 일대 신해 의병대장은 최대기 장군과 논의 끝에 대구의 최동보 의병장에게 서신을 보낸다. 영천의 권응수 장군과 세를 합치자는 내용의 전갈이었다. 다음날 신해 의병대장은 "하양은 작은 마을이고 왜적도 크게 쳐들어오지 않을 것인즉 그리 염려할 게 못된다, 우리 모두 신령으로 가자!"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황경림 장군은 생각이 달랐다.
"군사의 일에는 항상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어서 늘상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왜적이 이러한 허점을 노려서 공격해 온다면 우리 고장은 누가 지킬 것입니까? 차라리 군사를 나누어 역할을 수행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결국 신해 의병대장은 군사를 나누어 그날 바로 신녕으로 가서 권응수 장군과 합세한다. 5월 8일, 하양의 선비들은 다시 서당에 모여 신해 장군 대신에 황경림 장군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다. 황경림은 스스로 무능하다고 자처하면서 사양했지만 결국 많은 이들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의병대장의 소임을 맡게 된다. 요약하면, 황경림은 하양 지역의 2대 의병대장으로 활동한 선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