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유가족 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이 지난 5월 3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 관련 기업 처벌 및 정부 사과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거라브 제인뿐 아니라 2001년 레킷벤키저가 살인제품 뉴가습기당번을 제조판매 시작한 때부터 최근까지 옥시레킷벤키저 책임자 모두를 소환조사해 사법처리할 것"을 요구하며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최윤석
규제라는 게 그렇다. 기업활동을 규제하는 법률을 어떤 기업이 좋아하겠는가? 그래서 법이 제정되지 않도록 하거나 법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기업의 큰 관심사다. 하지만 기업을 견제하기 원하는 노동자나 소비자가 있기 때문에 기업의 마음대로 법을 주무르지는 못한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은 더 강력한 법률을 제정하고 싶지만 기업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서로 양보해서 규제가 탄생하게 되는 게 일반적이다. 타협에 의해 규제를 만든 다음에는 필요에 따라 규제를 완화할 수도 있고, 더 강화할 수도 있다. 그것 역시 의논하고 타협할 일이다.
인도 보팔사고 이후, 미국에 번진 거대한 분노기업이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질 때가 있다. 정부의 최고 책임자가 전적으로 기업 편에 있을 때이다. 1980년대 미국이 그랬다. 민주당 카터 대통령에 이어서 집권한 공화당 레이건 대통령은 규제완화와 작은 정부를 내세웠다. 기업은 카터 행정부 때 만들어진 법률을 후퇴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첫번째 타깃은 노동자의 화학물질 알권리법이었다.
카터 대통령이 임기 말에 입법안을 제출하였는데, 레이건 대통령은 집권 30일도 지나지 않아 노동부 장관 도노번을 통해 카터 입법안을 폐기한다. 기업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노동자와 시민들은 분노했다. 제품에 어떤 화학물질이 들어있고 독성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1년에 십만 명이 직업성 질환에 걸리는 것으로 추정되던 상황이었다.
노동자와 시민들은 연방법을 포기하고 주법에 도전했다. 뉴저지, 메사추세츠, 메인 같은 주에서 노동자와 주민을 위한 알권리법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카터 행정부에서 입법예고했던 내용보다 더 강력한 것이 등장하기도 했다. 기업들은 전략을 바꿔야 했다. 미국의 기업들은 레이건에게 연방법을 제정하자고 제안했다. 기업의 책임이 아주 약한 연방 알권리법을 제정해 놓으면, 주법보다 연방법이 우선하는 원칙을 이용하여 각 주별로 제정된 강력한 알권리법들을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3년 레이건 대통령은 '유해물질정보제공기준'을 제정했다. 그리고 각 주의 알권리법보다 연방법이 우선한다고 선언하였다. 기업은 다시 환호하였고, 노동자와 시민들은 깊은 절망에 빠져들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노력을 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방법 선점을 무력화하기 위한 소송을 걸었지만, 뒤집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때, 인도에서 보팔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이후 몇 시간만에 4천 명이 사망했고,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들은 1만 5천 명에 달한다. 보팔사고를 일으킨 유니온 카바이드는 미국 기업이었다. 1985년 유니온 카바이드는 미국 공장에서 보팔사고와 똑같은 물질이 누출되는 사고를 일으켜 주민들이 대피하기에 이른다. 거대한 분노가 미국사회에 번져나갔다. 그리고 단일한 요구로 이어졌다. 화학사고에 대한 대응은 제대로 된 알권리법 제정이라는 목소리가 모아졌다. 결국 1986년 비상대응계획 수립과 지역사회 알권리법이 제정되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알권리법이 가장 보수적이고 기업친화적인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 만들어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981년 카터의 알권리법을 폐기처분하고, 1983년 주별 알권리법을 무력화하면서 기업은 국민의 안전과 건강은 고려하지 않는 파렴치한 존재로 여겨지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힘으로 규제를 봉쇄해 버렸다. 그리고 보팔사고로 폭발한 분노는 이전의 어떤 법률보다도 더 강력한 법률로 기업을 규제하게 되었다. 피한 줄 알았던 규제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것이고,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된 것이다.
악마의 법률이 된 화평법, 국민들을 지킬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