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후 서울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목숨을 잃은 용역업체 직원 김아무개씨의 빈소가 있는 건국대병원 장례식장으로 행진해온 조문객들이 김씨 어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안홍기
이 사건·사고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사회적 약자들이 피해자란 점이다. 강남역 희생자와 신안군 성폭행 피해자는 모두 힘없고 약한 여성들이었다. 구의역 사고 희생자는 컵라면 먹을 시간도 없이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던 비정규직 노동자였으며, 남양주 지하철 공사장에서 숨진 노동자들 역시 경제적 약자였다. 표본을 조금 더 넓혀 본다 하더라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사건·사고 속에 희생당하는 건 언제나 사회·경제적 약자들이다.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과 한탄을 늘어놓으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이 나라 정치의 막막한 현실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모든 사건·사고를 막을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이들이 희생당하지 않아도 될 사회를 만들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그 소임이 정치에 있음은 물론이다.
법을 만들고 제도를 정비하고, 위법과 탈법을 감시하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일 터이다.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라면 그 불평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정치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정치가 보이지 않는다. 역할과 책임은 사라지고 특권과 권위만 남은 정치.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소외되고 위험에 노출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304명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 38명의 목숨을 앗아간 메르스 사태, 266명이 사망한 가습기 살균제 사건, 그리고 최근에 희생당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관련 법규에 대한 관리 점검만 제대로 이루어졌어도 그들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었을 터다. 정치가 실종되고 부재한 시대. 그들의 희생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