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 친척이어도 안부인사 속에도 폭력은 도사리고 있다.
오마이뉴스
물론 그 이전부터 그래왔겠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중학교 입학 때였다. 교복을 사놓고 입학식을 기다리며 설레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집안 행사에 참여했다. 중학생이 된다는 것을 축하한다는 말보다, 더 강렬하게 들렸던 말이 있었다. 한 친척이 "아유, 기인이 그렇게 살쪄서 교복이나 맞겠어? 교복 예쁘게 입으려면 살부터 빼야겠다, 야"라고 말했다. 누군가에겐 별것 아닌 소리일지 모르겠으나, 한창 감정선이 예민할 시기에 들었던 그 말은 큰 상처로 남았다.
참고로 나는 일생을 통틀어 마른 몸을 소유해 본 적이 없다. 평균보다 큰 키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 평균보다 많이 나가는 몸무게는 한국 사회에서 꽤 불편한 혹은 문제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 이후에도 각종 가족 행사나 명절 때 친척들을 만나게 되면, 으레 인사처럼 듣는 말은 "못 본 사이 살이 더 붙었네!" "적당히 먹어, 키가 너무 크면 또 남자들이 안 좋아해" "남자친구 생기려면, 다이어트 좀 해야겠는데?"(애인이 있으면, 앞의 말은 "시집가려면"으로 바뀐다) 등이었다. 물론 스트레스 받고 속이 상했지만, 달리 반격할 말이 없었다. 반격할 생각보다는 "정말 그런가?"라는 생각이 들고 이내 주눅이 들었다. 가장 충격적인 말은 친척 오빠에게 들었다.
"살 빼서 예뻐질 것 같으면 빼라고 하겠는데, 빼도 그다지 예뻐질 것 같지 않으니 그냥 이대로 살아."뭐랄까. 어차피 이래저래 별로니 시도조차 하지 말라는 말은 날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후 그와 비슷한 말을 대학생이 된 뒤 한 선배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이전의 더러운 기분이 되살아나 말문이 막혔다. 역시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뱃살이 두드러져 보일 때마다 듣는 말친척뿐만이 아니라, 한 집에 사는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누구보다 나를 걱정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가까운 사이인 만큼 쉽게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유아 시절부터 누군가로부터 귀엽다고 칭찬을 들으면, 언니와 엄마는 항상 농담처럼 "예쁘지 않은 사람한테는 예의상 그냥 귀엽다고 해주는 거야"라고 굳이 말해주곤 했다(이때부터 칭찬을 들어도 믿지 않게 됐나...).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는 사춘기 시절엔 몸매 보정 속옷(가슴부터 엉덩이까지 한 번에 덮는 올인원 형태의 보정 속옷)을 입혀주기도 했다. 허리선과 가슴 등 한창 자랄 때 예쁜 모양이 잡혀야, 성장 후에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수영복을 연상시키는 이 무시무시한 속옷은 통풍도 잘 되지 않는 나일론 소재에 사방으로 철사같은 심이 박혀 몸매를 잡아줬다.
몸매를 잡는 건지, 사람을 잡는 건지 결국 온몸을 옥죄어오는 답답함뿐만 아니라, 소화장애, 땀띠까지 유발하는 통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벗어던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종종, 원피스를 입었을 때 뱃살이 두드러지게 보인다거나 하면, 엄마는 뱃살 지적 폭풍 잔소리와 함께 올인원 착용을 권했다. 최근 엄마에게 듣는 몸에 대한 메시지는 이렇다.
"그렇게 먹으니 살이 찌지" "뱃살이 곧 가슴 추월하겠는데?" "등판 더 넓어 보인다, 어깨 좀 펴고 다녀." "여름인데 살 좀 빼라."이쯤 되면 보기 좋을 정도로만 다이어트하고, 현실에 적당히 순응하겠다는 마음이 들 법도 하다. 감량하고 더 예뻐지면, 솔직히 손해 볼 일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구차한 변명일지 모르나, 그러고 싶지 않다. 폭언 따위에 순응하는 것보다는 잘 대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