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이정근
조선은 근본적으로 반상 계급사회다. 양반과 상놈 사이의 착취구조가 공고했던 조선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세종 8년 3월 4일. 사헌부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송사에서 제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한 김도련이 힘 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공여하여 승소판결을 받아냈습니다. 우의정 조연은 15명을 받았고 곡산부원군 연사종은 10명을 받았으며 병조판서 조말생은 24명을 받았습니다. 조말생은 당시 형방 대언으로 노비소송 문제를 도맡아 왕명을 출납하였는바 그는 뒤에서 김도련을 조종하여 그로 하여금 유리한 판결을 받게 한 뒤 뇌물을 받았습니다. 전 우의정 정탁과 평성부원군 조견, 공조참의 조숭덕은 이미 죽어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이 한입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소상히 조사하여 보고하라."사건의 발단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철원호장 김생이 간성호장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김송과 김진의를 낳고 함흥 홍원으로 이주하여 농사와 장사로 부를 쌓았다. 그의 휘하에는 자손과 노비가 426명이나 되었다. 함흥일대에서 잘나가는 신흥토호다. 당시 부의 척도는 토지와 노비 숫자다. 노비는 소와 말처럼 사고파는 물건이었다.
김도련의 아버지 김원룡이 장사하러 흥원을 방문할 때면 김생의 집에 묵었다. 그들은 호형호제하며 절친이 되었다.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자수성가하여 거하게 살고 있는 김생이 부러웠고 또한 그의 재산이 탐났다. 그의 아들 김송의 이름에서 허점을 발견한 김원룡은 김송이 도망한 종 허송의 소생이라고 문천 관아에 참소하여 천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의 재산과 노비를 손에 넣어버렸다. 이 때 그의 뒤를 봐준 사람이 당대의 세력가 임견미다.
여말선초((麗末鮮初).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던 초기. 사회혼란을 틈타 권력을 이용하여 양민을 천민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만한자를 무함하여 노비를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노비는 노비들대로 도망하여 양인행세를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변정도감을 설치하고 노비송사만 전담하게 했다. 이 때 노비로 전락한 김송이 억울하다고 소를 제기하여 김원룡의 아들 김도련과 송사가 벌어진 것이다. 아버지 대에 이은 2회전이다. 수세에 몰린 김도련이 재물을 지키려고 뇌물을 뿌린 것이다. 정밀 조사를 마친 사헌부가 보고했다.
"이미 사망한 평성부원군 조견에게 17명, 돌아간 우의정 정탁에게 7명, 현 우의정 조연에게 6명, 곡산부원군 연사종에게 7명, 이원에게 4명, 고 참의 조숭덕에게 8명, 조말생에게 36명, 정주목사 남궁계에게 2명, 총제 이흥발에게 4명, 지선천군사 윤간에게 14명, 지안산군사 김이공에게 3명, 소경 최득비에게 1명, 대호군 이을화에게 1명, 전 정랑 오비에게 1명, 전 사정 신득지에게 8명, 변귀생에게 12명, 전 판사 이열에게 1명입니다."전 방위 로비다. 뇌물을 받은 자가 늘어났고 조말생 경우에는 24명에서 36명으로 뇌물 금액이 불어났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옛말에 정권을 오래 잡고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제 생각하니 이해가 간다. 말생과는 지신사부터 병판까지 10여 년간을 같이했는데 오늘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세종은 탄식했다. 조말생이 누구인가? 현직 병조판서다. 선왕 대부터 총애를 받은 구신(舊臣)이다. 지신사(비서실장)로 가까이 두었고 영상자리에 찜해놓은 신하다. 헌데, 그가 부정부패에 연루되었고 비리의 뒷배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조연은 황해도 수안에 부처하고, 연사종은 강원도 인제에 부처하고, 조말생은 직첩을 빼앗고 충청도 회인에 부처하라."솜방망이 처벌에 조정이 들끓었다. 사헌부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영어를 알았다면 '헬조선'이라고 탄식했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