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남성들의 생각은 어떨까. 지난 28일 오전, 20대 남성 4명과 마주했다.
김예지
"남성은 잠정적 가해자가 아니라 그냥 '가해자'다.""혐오의 가장 높은 단계는 살인이다. 남성 전반이 의심받고 일반화 당하는 게 당연하다."여느 페미니스트의 말이 아니다. 네 명의 '반성하는' 남자들이 모여서 한 말이다. 이들은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하고, 여성들이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는 것이 '성별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는 주장에 코웃음을 친다. "여성들의 고통과 분노에 공감하고, 우리가 여성혐오 사회에 일조했다는 것에 반성하자"는 게 네 명의 공통적인 목소리다.
'반성하는 남자들'은 분명 한국 사회에선 소수에 가깝다. 스머프(28)는 남성으로선 드물게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는 직장인이다. 생선(27)은 진보정당 활동을 하며, 대학 내에서 여성주의 모임도 계획 중이다. 자몽(24)은 대학 내 독립언론에서 글을 쓰며, SNS에서 활발하게 '여성 혐오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먼지(27)는 주변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고정된 성 역할'에 반발하는 목소리를 내며 고군분투 중이다.
다음은 지난달 28일 서울역의 한 카페에서 2시간 가량 진행된 좌담회를 정리한 내용이다. 솔직한 대화를 위해 익명을 사용했다.
"이번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 여성들 분노 왜 이해 못하나"사회자: 처음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접하고서 여성들처럼 즉각적인 분노나 공포가 일어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스머프: 이젠 강남 한복판에서도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구나 싶다가, 나중에 추모 움직임이 일면서 '여성혐오' 범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자몽: 처음엔 머릿속에 큰 물음표가 생겼다. 황당했다. 그러다가 남성들도 화장실 갔는데 여성만 죽였다는 말을 듣고 '페미사이드(femicide -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 사건이라는 생각을 했다.
생선: 비슷하다. '묻지마 살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가 가해자가 경찰 조사에서 '여자라서 죽였다'고 말한 것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먼지: 별생각 없었다. 강남 인근에서 학원을 다니는 여자친구가 "강남역 10번 출구인데 누가 죽었다"고 했다. 그때 그냥 "그래, 조심해"라고 말했다.
사회자: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나?
스머프: 혐오범죄 관련 법률이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혐오범죄다 아니다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혐오범죄로 느껴졌다. "여자가 무시해서 죽였다"는 말과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타깃 삼는 양태 자체가 사회에 만연한 '여혐'과 동일하다.
생선: 이 범죄를 보고 많은 여성들이 일상적인 차별과 위협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있다. 직접적인 살해 동기가 여혐이 아니더라도, 이런 맥락에서 여성혐오 범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자: 이번 사건으로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거부감은 없나?
스머프: 이번 사건이든 여성을 상대로 한 다른 범죄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낯선 남성이 저지른 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맥락에서 볼 때, 밤 길을 걷는데 여성과 나밖에 없으면 여성은 나를 보고 '잠재적 가해자'로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범죄자란 말이냐'라며 화를 낼 게 아니라 그냥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생선: 여성이 일상에서 겪는 폭력에 대한 위협이나 공포가 얼마나 큰지 몰라서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에 발끈하는 것 같다.
먼지: 나는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아예 가해자라고 생각한다. 그 사건은 사회적인 사건이다. 여성 혐오적인 사회가 이 사건을 만들어냈다. 그러한 사회가 되는 데 나는 엄청난 기여를 했다. 그 여성이 살해당한 것에는 나의 흔적이 있다. 나의 혐오적 발언, 시선 등등... 그래서 나는 나를 포함한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그냥 가해자라고 생각한다.
사회자: 전체 남성을 가해자 내지 잠재적 가해자로 부르면 보통의 남성을 연대 대상으로 포섭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꼭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명명해야 하느냐'는 말도 나오는데.
자몽: 그런 사람들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 안 써도 연대 안 할 거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같은 거 외치시는 분들 아닌가.
먼지: 전략적인 발언을 해라, 전략적으로 대응해라 하는데... 나는 지금이 가장 전략적인 것 같다. 가해자들은 (범죄) 대상 고를 때 약한 사람 고른다. 지금 여성들이 이렇게 들고 일어나면 그렇게 못하지 않겠는가?
생선: 여성 중에서도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공감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혐'같은 센 단어 안 쓰면 이슈화조차 힘들다. 이슈화가 돼야 연대 대상을 찾을 수 있다. 부드럽게만 하면 봐주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