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입구에는 ‘영가’가 관객을 맞이한다. 한하운 시인은 힘들었던 슬픈 날을 ‘영혼의 노래’로 승화했다.
김영숙
한하운 시인의 본명은 한태영이다. 함경남도 함주군 동촌면, 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난 한하운의 출생연도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친필 이력서나 여러 가지 기록에는 1919년 출생이라고 적혀있지만, 김정훈 학예사가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찾아본 자료에는 1920년으로 기록돼있는 것들도 있었다. 그래서 김 학예사는 이번 특별기획전에선 출생년도에 물음표를 달았다.
"행정자료에는 1919년으로 나와 있긴 해요.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과에 다니다 열일곱 살 때 나병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도 일본이나 중국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급성으로 발병돼 투병생활을 시작합니다."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낙향해 방안에 틀어박혀 병과 싸워가며 문학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본명 대신 필명 '하운'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45년이었다. 그런데 그는 해방의 기쁨보다 지주 집안으로 몰려 가산 일체를 몰수당하고 이듬해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
그는 시국사건에 연루돼 원산형무소에 갇혔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 후 곳곳을 떠돌며 걸인으로 연명하다 1947년 서울 명동에 진출한다.
"한하운은 당시 문인들이 자주 다니던 다방에서 자신이 쓴 시를 팝니다. '파랑새' '비오는 길' '개구리' 등을 도화지에 써서 사달라고 하면, 천대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걸 계기로 당대 유명한 시인을 만나기도 했고요."그 인연으로 이병주 시인이 그의 시 26편을 모아 첫 시집인 '한하운 시초'(정음사. 1949)를 발행했다. 한하운 시인은 그렇게 등단한다. 그가 시인으로 전국에 알려지자, 같은 병을 앓던 환자들이 '구걸하지 말고 같이 모여 살자'고 제안했고,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1949년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으로 갔다.
그리고 1950년 3월, 현재 부평농장이라 불리는 곳에 정착했다. 그 당시 정부에서는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 사는 한센병 환자들을 집단으로 수용하는 정책을 만들었고, 그 장소로 부평을 선정했다.
"이번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눴습니다. 1부는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인간, 한하운'입니다. 나병에 걸리기는 했지만 보통의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절규하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2부는 '시와 더불어 살고 싶었던 시인, 한하운'입니다. 슬픈 운명에 처했지만 시로 삶을 다시 노래한 문학작품이 전시돼 있습니다. 마지막 3부는 '새 빛 아래에서 살고 싶었던 위인, 한하운'입니다. 부평에 정착한 이후의 삶을 담았습니다. 음성 판정을 받고 나서도 시 습작은 물론, 잡지나 계몽지에 나병에 대한 잘못된 세상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활동한 사회사업가로서 모습을 부각했습니다."한하운 시인 타계 41주기, 재조명 사업을 시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