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들어섰던 시민아파트를 철거하고 2012년 복원한 인왕산자락 옥류동천의 최상류인 수성동계곡
유영호
윤동주 하숙집에서 위로 약 200미터쯤 가면 바로 옥류동천의 최상류인 수성동계곡이다. '수성(水聲)'이란 물소리가 좋다는 뜻으로 추사 김정희의 시 "수성동우중에 폭포를구경하다(水聲洞雨中觀瀑此心雪韻)"와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가운데 한 곳일 정도로 조선시대 명승지 가운데 하나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 한석봉과 함께 조선 최고 명필로 꼽히는 안평대군의 집 '비해당'(匪懈堂)이 있던 곳이다.
당호는 아버지 세종이 직접 내린 것으로 시경 증민편에 나오는 '숙야비해이사일인'(夙夜匪懈 以事一人)에서 따온 것이다. 그것은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게을리 하지 않고 한 사람을 섬긴다'는 뜻으로 너무 똑똑하고 뛰어난 셋째 아들이 혹시 딴 마음 먹거나 엉뚱한 움직임에 휩쓸리지 않고 큰 형(문종)만을 잘 보필하라는 의미였다.
조선은 건국 이래 왕자의 난 등으로 피바람만 몰아친 채 장자승계의 원칙이 한 번도 지켜지지 못한 것을 세종은 자기 대에서부터는 반드시 이루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뛰어난 셋째 아들 안평대군을 두고도 맏아들 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형을 잘 보필하라고 지어준 세종의 바람이 담긴 당호였다.
그러나 안평대군의 삶은 아버지 세종의 희망과 달리 순탄하지 못했다. 문종이 즉위 2년 3개월 만에 그만 승하하면서 또다시 피바람이 불어온 것이다.
문종이 죽자 그의 외아들이었던 단종에게 왕위가 계승되었지만 단종의 삼촌이자 안평대군의 형이었던 수양대군의 왕권찬탈(계유정난)이 벌어지면서 안평대군 역시 강화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바로 자기 친형에게 사약을 받게 되었다.
그야말로 자신의 이름처럼 안평(安平)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36세에 세상을 하직했으며, 무척이나 예술을 사랑했던 그였지만 정반대로 정권투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이런 안평대군의 삶이 서려있는 곳이기에 이곳 수송동계곡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계곡 숲 속 저편에 있었을 비해당을 그려보며 안평대군을 상상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곳 비해당은 안평대군이 죽자 세종의 둘째 형이자 안평대군의 삼촌인 효령대군이 차지하였다.
효령대군은 안평대군보다 22년 먼저 태어나 33년을 더 살아서 90세까지 장수하였음에도 이곳 수성동계곡에서 효령대군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후대는 90세를 산 효령대군보다 36년 밖에 못살고 떠난 안평대군을 기억한다.
언젠가는 죽음을 피하지 못할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 <몽유도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