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피플파워
채현국 이사장을 살펴보자. 우리가 아는 '흥국'으로 시작되는 모든 기업들의 총수였다. '흥국'이란 '채현국이 흥해라'라는 뜻으로 채현국 이사장의 아버지 채기엽씨가 지은 이름이다. 채현국은 회사 이름 대로 흥했다. 양산 개운중학교, 경남대학교(당시 마산대학교)를 샀으며, 강원 도계 흥국탄광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돈을 벌었다.
채현국 이사장은 1960년대 당시 돈으로 매달 200만 달러에 가까운 흑자가 났다고 한다. 1970년 납세자 순위 전국 2위였다. 탄광이 주 수입이었고, 이 외에도 조선(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1000톤 단위의 배를 만든 곳이 흥국조선이다), 금융, 종묘장 등 손을 안 대는 것이 없었다. 아마 계속 쭉 흘러갔으면 삼성, 현대 못지않은 대재벌이 됐을 것이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했다. 대한민국은 독재국가가 됐다. 독재란 정치적으로만 자유가 억압된 것이 아니다. 독재란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단어다. 딱 잘라 말해서 이제 대한민국은 박정희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채현국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그 전에 경남대학교도 문교부에 헌납했다(그걸 피스톨 박, 박종규 경호실장이 먹었다. 지금도 박종규 일가가 경남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흥국탄광은 노동자들에게 그냥 나눠줬다. 원래 내 것이 아니니 가져가라고 했다. 나서지 않는 노동자들에게는 몇 년 치 임금을 쥐여줬다. 그중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 도망쳐 온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채현국은 그런 사람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고 한다. 이름을 몰라야 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더라도 못 불지 않겠냐는 것이다.
서울대 친구들을 불러 모아 기업을 그냥 쪼개줬다. 그냥 던져 줘 버렸다. 니가 이사해라, 니가 사장해라. 나는 더는 못하겠다. 그중에 어리숙한 친구가 있었다. 채현국을 몰래 등기이사로 올려놨다. 아마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부도를 냈다. 등기이사 채현국은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렇게 1973년 이후 지금도 채현국은 신용불량자다. 그때 채현국의 나이 38살이었다.
기자는 채현국 이사장이 있는 양산에 가본 적이 있다. 학교 건물 안에 채현국 이사장의 거처가 있다. 요즘 신식 원룸보다 조금 더 못한 5평 남짓한 원룸에 옷가지 몇 벌을 걸어 놓고 살고 있었다. 그래도 학교 이사장이니까 학교에서 밥이 나오고 부인이 전 국립대 교수니 연금이 있다. 또한 잘 나갈 때 민주화 운동가나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막 사줄 때가 있었다. 그런 인사들에게서 '삥을 뜯으며'(최근엔 좀 유명해져서 전국을 다니며 특강료를 받으며) 통장 하나 없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