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이희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전 살아남았습니다. 제가 돈이 많아서 혹은 나이가 많아서 혹은 노래방을 가지 않는 사람이라서 살아남은 걸까요?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우연'이 절 살렸습니다. 왜냐면 저는 여자니까요. '여자라서 죽였다'는 말에 전 아직 죽지 않아 안도감을 느낀 것이 아닌, 오히려 언제 또 범죄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크게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저는 앞으로도 계속 여자일 테니까요.
"일찍 다녀" "조심해"라니요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비싼 브랜드 커피를 마시며 동등함을 추구해야 할 남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인걸까요, 아니면 그저, 김치녀라 불리는 그런 여자와 개념녀라 불리는 그렇지 않은 여자로 나뉘는 카테고리 속에서 어떤 카테고리를 선택해서 살지만 정하면 되는 여자인 걸까요.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 건물 화장실에서 20대 초반 여성이 한 남자의 무차별 칼부림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여성분은 어떤 카테고리를 지닌 여자였기에 죽임을 당한 걸까요. 우리는 계속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기사로, sns로, 뉴스로 이 여성분은 단지 '여성'이었기 때문에 한 순간에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는 것을요.
단순한 살인사건, 묻지마 살인으로 보기엔 가해자의 범행동기가 너무나 명확하지 않나요. '여자'에게 무시 받는 것이 화가 나, 본인을 무시했던 '여자'들에게 분풀이를 위해 일면식도 없는 '여자'를 죽였다는 것을요. 이것은 명확한 여성혐오가 불러일으킨, 지독하게 끔찍한 살인사건입니다. 그런데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니 잠재적 범죄자로 몰지 마시길'이라니요, '화장실녀', '노래방녀'라니요, '가해자는 목사를 꿈꾸던 여자에게 무시 받은 남자'라니요.
여자 대 남자로 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이 없어진 이 마당에 성별로 나뉘어 '너희가 잘못이야', '너희 정말 끔찍하다'라는 말들로 편을 갈라 승강이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적어도 누군가가 '여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에는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요. 전혀 범죄가 일어날 법한 상황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누군가가 변을 당했습니다. '일찍, 일찍 다녀'라뇨, '조심해'라뇨.
팩트에 더 집중을 해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팩트에는 범행 동기라는 게 절대 무시될 수 없는 사항이라는 말도요. 원인 없는 결과는 없을 테니까요. 모든 남성분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모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엔 저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분들이 더 많을 테고 저런 생각조차 갖지 않고 건강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요. 하지만 본인의 반응이 '난 아냐', '내 일이 아냐' 혹은 '난 저 자리에 없었으니까', '앞으로 더 조심해서 다녀야지'와 같은 형식이라면 우린 좀 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봐야 할 시간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그건 '러시안 룰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