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 교사였던 5.18민주화운동유공자 이상호씨.
이희훈
1980년 이후, 그렇게 살아왔던 36년 삶에 한줄기 빛이 스며들었다. 지난 2월 18일 오후 5시 쯤,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열었더니 웬 남성이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전에 잡상인들이 종종 초인종을 눌렀던 터라 별 생각 없이 남성을 내보내려는데,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육군 35사단 헌병대 영창에서부터 서울 성동구치소까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이상호 선생이었다. 이 선생은 당시 전주 신흥고등학교 교사였는데, 1980년 5월 27일 신흥고등학교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돼 1년 4개월 동안 복역했다. 이 선생은 "8개월 넘게 수소문한 끝에 김상회 너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5년 '5.18피해자 (추가)보상신청법안'이 만들어지고 그해 6월 30일까지 신청 작업이 진행되자, 이 선생은 나를 찾아나섰다. 그간 보상신청 명단에 내가 없었던 것을 안 이 선생은 내게 보상신청을 권유하기 위해 수소문을 시작한 것이다.
이 선생이 나를 찾기까지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강원도청, 강원대학교 등 공기관은 물론, 강원도의 지인을 동원해 나를 수소문했지만 돌아오는 건 "강원도에서 2015년 5월 18일은 그냥 월요일에 불과하다"는 싸늘한 대답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 선생은 광주에 있는 안종철 박사(전 5.18 기록물유네스코 등재 추진단장)를 알게 됐고, 안 박사에게 광주광역시청 인권평화협력관실을 소개받았다. 결국 5.18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인권평화협력관실의 정보를 통해 나를 찾아올 수 있었다.
눈물이 나왔다. 나를 찾기 위해 그토록 노력해준 이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36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다시 36년 전 일을 꺼낸다는 게 쉽지 않겠지만, 실제로 나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은 분들이 많기 때문에 그 동안 움츠리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마침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제 7차 보상 작업에 들어간다고 해, 올해 2월 말까지 진행되는 '연행, 구금, 수형' 분야 신청을 마쳤다.
내 기억이 5.18 기록의 한 조각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