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올해도 논란이 되고 있다. 16일 보훈처는 이 노래의 제창은 하지 않고 합창만 하는 현행 방식을 유지하기로 했다. 사진은 2015년 5월 18일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5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정의화 국회의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국무총리 직무대행으로 이날 기념식에 참석한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제창을 하진 않았다.
남소연
다시 또 5월이 왔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어린이 날'로 기억되는 5월로, 또 누군가에게는 '스승의 날'이 담긴 5월로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있어 매년 5월은 '1980년 광주민주항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올해로 36주년을 맞이하는 광주민주항쟁을 제가 처음 알게 된 때는 대학을 입학하던 1989년 5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대학 운동권 선배가 모처에서 비밀리 구해왔다는 낡은 비디오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호기심 속에서 접한 그 날의 영상은 이후 제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전남도청에서 항쟁하는 시민군을 전두환 신군부가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장면, 울부짖는 어머니와 싸늘하게 식은 아들의 시신, 그날 새벽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며,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이라며,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던 한 여학생의 마지막 절규를 비디오에서 보며 저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제 삶속에서 광주는 양심의 기준의 되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80년대 이후 이 나라 운동권은 그 광주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알게된 후 그날의 5월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훗날 운동권으로 살게된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80년 5월 광주의 눈물, 내 삶을 바꾸다그렇게 살아오며 가장 기억에 남는 싸움 중 하나는 1995년의 일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기억속에 각인되어 있는 12.12 군사 반란의 주역, 전두환과 노태우가 나란히 손잡고 수의를 입은 채 법정에 서 있는 장면. 바로 그 한 장의 사진을 남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싸워야 했는지 아실까요?
1995년 8월, 5.18 광주 학살자 처벌을 위해 매주 수만 명의 국민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 등 학살자의 처벌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쳤고 최루탄과 화염병은 하늘 위로 공방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격 선포된 '5.18 특별법' 제정. 정말 믿을 수 없는 정의의 첫 승리를 맛본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리고 이후 1997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정권 교체로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대한민국 50년 헌정 역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노사모 열풍속에서 노무현 참여정부가 세워진 후 많은 이들은 확신했습니다. "아. 이제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민주주의 시대가 열렸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민주정부 10년은, 어처구니없게도 이명박과 박근혜 3년을 거치며 8년 만에 참담하게 무너졌습니다. 민주주의는 위기에 빠졌고 국민은 감시당하며 항의는 감옥으로 끌려가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살되는 민주주의 위기속에서 광주민주항쟁 역시 다시 고통받게 됩니다.
그중 하나가 광주민주항쟁을 '북한군 개입에 의한 폭동'이라고 조작, 왜곡하는 지만원 같은 자들의 주장입니다. 피해자들의 얼굴을 북한의 고위직과 닮았다고 우기며 다시 또 그 피해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의 행위보다 더욱 참담한 일은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하에서 자행되고 있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탄압입니다.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탄압, 어처구니 없어사랑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논쟁이 시작된 것은 이명박 정부 2년차가 되던 2009년 5월의 일이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최후를 맞이한 당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와 그 이전에 생을 달리한 후배 박기순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영혼 결혼식을 추진하면서 추모곡으로 만든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후 5.18 학살 피해 유족들의 한을 달래주는 위로가 됩니다. 광주를 피로 짓밟고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독재하에서 5.18 피해 유족들은 1983년 이후 숨어서 먼저간 가족들을 추모하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울며 부릅니다.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피맺힌 절규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분출하는 또 다른 '한'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그런데 이처럼 처음에는 유족끼리 모여 전두환 권력의 탄압을 피해 '몰래' 불러왔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마침내 정부 주도하에 열린 추모행사에서 공식적으로 제창할 수 있었던 때는 1997년 5월의 일이었습니다. 김영삼 문민정부하에서 5.18 광주민주항쟁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면서 가능해 진 것입니다.
따라서 1997년부터 2008년까지 근 11년간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당당히 정부 주도의 기념 행사에서 합창단과 추모행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부르는 제창가로 식순을 차지합니다. 저 역시 그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며 감동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이런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못하게 한 것이 바로 이명박 정부 2년차가 되던 2009년의 일입니다. 그 해, 이명박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방송사 생중계 전 부르는 식전 공연으로 바꿉니다. 그러더니 2010년과 11년에는 아예 무용 배경 음악으로 변형해 추모행사에서 제창도, 합창도 할 수 없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노래 탄압에 대해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항의했습니다. "피해자가 자신들 방식의 추모를 위해 노래를 부르겠다는데 가해자인 국가가 탄압하는 것이 말이 되냐"고 따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항의에 대해 정부를 대표하는 국가보훈처와 수구 세력들은 엉뚱한 이념 논쟁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부르는'임'이 사실은 북한 김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는 표현은 사회주의를 의미한다는 식의 거짓과 호도로 본질을 흐리는 부도덕한 공격이었습니다. 정말 일고의 가치도 없는 왜곡과 조작은 5.18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는 '또 다른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36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야당 원내대표와 만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여부에 대해 보훈처에 재검토를 지시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16일 보훈처는 제창 아닌 합창 방식을 유지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두고 여러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는 매우 의미있는 새로운 버전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러한 논쟁을 보며 한 래퍼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랩 버전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고주몽. 한때 트위터에서 '변휘재'라는 계정으로 '변희재'씨를 비판하여 나름 명성을 얻기도 한 사람입니다.
래퍼 고주몽이 만든 랩 버전 '임을 위한 행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