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사 영정각 안에서 보는 조헌 선생과 영규 승병장의 모습. 본래 영정은 일제 강점기 때 '왜놈'들이 없애버렸고, 지금 것은 그 모작이다.
정만진
아니나 다를까, 가산사 들머리의 안내판은 스스로 임진왜란 당시의 승병과 의병 근거지였음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제 자랑 꼴불견'이라지만 우리나라 국민 어느 누구도 가산사의 자화자찬에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는 이는 없으리라. 외적의 침입 때마다 백성들이 분연히 일어나 떨쳐보인 창의 정신은 항몽(抗蒙) 이래 우리가 세계 만방에 자랑할 수 있는 유구한 민족 정신이기 때문이다.
'옥천 가산사(佳山寺) 영정각(影幀閣) 및 산신각(山神閣) 충청북도 기념물 제115호 충북 옥천군 안내면 안내회남로 671
채운산(彩雲山) 기슭에 자리잡은 가산사는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절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지리지(地理誌)에, 가산암(佳山菴)이 오래 전에 없어진 작은 암자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어서 자세한 내력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기허당(騎虛堂) 영규(靈圭) 대사와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이 이곳에서 승군(僧軍)과 의병(義兵)을 일으켜 훈련하였다고 하여 호국도장(護國道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은 힘을 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 전투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숨을 거두었다. 이에 가산사에서는 영정각을 짓고 영규 대사와 조헌 선생의 영정을 모셨는데, 일제 강점기에 영정은 없어지고 지금은 위패(位牌)만 모셔져 있다. 영정각 지붕 끝 기와에 새겨진 글로 보아 영정각은 조선 숙종 20년(1694)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의 형태는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木造) 기와집으로, 매우 작은 규모이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산신각은 산신탱화(山神幀畵)를 봉안하기 위한 집으로 영정각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건축 용어 설명 |
용마루 :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망와 : 지붕의 마루 끝에 세우는, 와당이 달린 암막새 와당(瓦當) : 기와 막새나 내림새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것 암막새 : 암키와가 쭉 이어져 형성된 기왓골의 끝에 드림새를 붙여 만든 기와 수막새 : 수키와가 쭉 이어져 형성된 기왓등의 끝에 드림새를 붙여 만든 기와 드림새 : 막새의 끝 부분. 초기에는 기와 끝을 조금 짓이겨 처져 내려오도록 하는 정도였으나 차츰 덧대어 각종 문양을 새기는 것으로 발전했다. 반원형, 타원형도 있으나 원형이 대부분이다. 암키와 : 지붕의 고랑이 되도록 젖혀 놓는 기와. 바닥에 깔 수 있게 크고 넓게 만듦. 수키와 : 두 암키와 사이를 엎어 잇는 기와. 속이 빈 원기둥을 세로로 반을 쪼갠 모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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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은 영정각이 1694년(숙종 20)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가 그 건물 지붕 끝 기와에 새겨진 글이라고 해설한다. 지붕부 용마루 끝에 올려져 있는 망와(望瓦)에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이 건물의 역사를 증언하는 중요 단서가 된다는 설명이다. 처마 밑에 서서 그냥 쳐다보아서는 기와에 새겨진 글자를 읽을 수 없지만,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康熙三十三年 甲戌四月望日 施主金貴奉 化主安得信 別座雪岑 供養主戒明 近人安白雲 惠印 主導(강희 33년 갑술사월망일 시주김귀봉 화주안득신 별좌설잠 공양주계명 근인안백운 혜인 주도)' 1694년(숙종 20, 청 강희제 33, 갑술년) 4월에 김귀봉, 안득신, 설잠, 계명, 안백운, 혜인이 주도하여 영정각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건축 시기가 밝혀져 있는 이 망와는 조선 후기 목조 건축사를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녔다. 그래서 영정각은 충청북도 기념물 11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