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일간의 PCT 종주기록이 담긴 <4,300km>
푸른향기
PCT는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미대륙 서부지역을 종단하는 대표적인 장거리 트레일의 하나이다. 전세계 하이커들에게는 평생의 버킷 리스트이며, 2016년에도 수백명의 하이커들이 PCT 종주를 목표로 길 위에서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 중 한국인 하이커는 약 10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PCT가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와일드> 덕분이다. 영화와 소설 <와일드>의 배경이었던 PCT는 모험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였고, 같은 해 무려 4명의 한국인이 한꺼번에 PCT를 종주하기에 이른다.
이 대목에서 '무려'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미 연방정부와 자원봉사자들이 합심하여 PCTA(Pacific Crest Trail Association)를 조직한 것이 1993년이었고, 그후 2015년까지 23년 동안 적어도 국내에 거주하는 한국인 PCT 종주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구 끝까지 걷는 자 인류는 호모 에렉투스 이래 완전한 직립원인으로 진화한 이후 두발로 걷기가 생존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동작이었을 것이다. 먹이를 찾거나 무리를 지키고 영역을 정찰하기 위해 '걷기'를 했을 것이며, 사냥감을 만나거나 천적을 만났을 때는 보다 빨리 걷기, 즉 '뛰기'를 했을 것이다.
동아프리카 사바나 지대를 벗어난 인류의 조상이 지구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갔을 때 그들은 오로지 걷기만으로 혹독한 추위를 뚫고 북유럽 대륙 끝으로, 보다 풍요로운 열대 과일이 있었을 동남아시아 남단까지 닿았다.
마침내 용맹스러운 일부 무리는 빙하기 말 얼어붙은 베링해협의 '육교'를 걸어서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였고, 마침내 인류는 전 지구를 장악하게 된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1만2000년 전의 일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겠다.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한양에 닿기 위해 짚신 여러 켤레를 장만하여 봇짐을 메고 걷기에 나섰을 테니까.
그런데 문명이 발달하고 생산성이 극도로 향상된 오늘날에는 걷지 않아도 먹거리를 해결할 수 있으며, 걸어서 영역을 정찰하거나 확장할 일도 없어졌다. 스스로를 거리낌없이 하이커 트래시(Hiker Trash)라고 부르며 함부로 자란 수염과 때에 찌든 복장으로 야생의 들길을 걷는 자들. 이들은 먹이감을 찾거나 한양에 일이 있어 걷는 것이 아니다. 그저 '걷기' 행위 자체가 동기이자 결과이다. 전혀 다른 신인류, 걷는 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175일간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