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국립도서관 앞
김윤주
몽파르나스에서 루브르로 이동한 후 어제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는다. 근처에 국립도서관이 있다는 표지를 어제 보았는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보이질 않는다. 루브르 앞 광장의 부티크와 카페를 기웃거리며 어제 얼핏 본 도서관 표지판을 부지런히 찾아본다. 오페라 쪽으로 하염없이 걷다 보니 안내 표지가 보인다. 한국 식료품점 K-mart도 우연히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들어가 김치 사발면과 맥주, 김밥과 물을 샀다. 부자가 된 기분이다.
몇 개의 골목을 돌고 돌아 마침내 도서관을 찾았지만 이런 젠장, 야속하게도 공사 중이다. 도서관 담벼락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선다. 헛헛한 마음 때문인지 갑자기 출출해진다. 요 앞 공원에서 점심이나 먹고 가자 싶다. 입구가 철문으로 잠겨 있길래 공원을 반 바퀴 돌아 맞은편 입구로 갔다. 그런데 여전히 같은 모양새다. 이상하다. 도서관이 공사 중이라 공원도 출입금지인가? 혹시나 하고 철문을 밀어 보니 스르르 열린다. 이런 허무할 때가! 손으로 만져 보고 한 발 디뎌 보면 쉽게 해결될 일을 우물쭈물 망설이다 얼마나 많이 놓쳐 버리곤 하는지. 하물며 물설은 남의 나라에서야.
공원에 앉아 멋진 분수대를 바라보며 K-mart 김밥을 꺼내 먹는다. 한 줄에 4유로 99센트 하는 김밥이 서울에 흔한 천 원짜리 김밥만 못하지만 배고픈 방랑자에겐 꿀맛이다. 옆 벤치엔 바게트를 뜯고 있는 프랑스 엄마와 꼬마. 그 옆엔 한국식 포장 도시락을 먹고 있는 중국인 부부와 딸 둘. 그 옆엔 동네 친구 같은 프랑스 엄마 둘, 그리고 스카이 씽씽과 미끄럼 타기에 한창인 그녀들의 아들 딸들.
백여 년 전 파리의 이방인 말테가 그랬던 것처럼 국립도서관에 앉아 프랑시스 잠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백석과 윤동주를 읽겠다던 야무진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지만, 도서관 앞 공원, 놀러 나온 파리 8구 주민들 틈에 앉아 먹은 김밥과 대낮의 맥주 한 캔은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고 시간은 느리기만 한데 입속을 맴도는 구절들. 육첩방은 남의 나라, 6층 다락방도 남의 나라, 파리 8구의 작은 공원도 남의 나라...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의 백석과 동경 육첩방의 윤동주와 파리 6층 다락방의 릴케. 모두들 한데 모이면 참 재미날 텐데.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좋아하는 '프랑시스 잠'의 시를 이야기하며 날이 새도록 즐거워할 텐데. 남의 나라 도서관 앞 작은 공원에서 꾸역꾸역 상상해 보는 그림 같은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