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이 국한문혼용으로 되어 있어 한자 독해력이 있으면 내용을 알아볼 수 있는 양세오충각의 비
정만진
이미 1586년(선조 19) <만언소>를 올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의 잘못을 통타했던 조헌은 그 이듬해인 1587년 일본 사신을 받아들이지 말 것과, 동인이 나라를 잘못 이끌고 있다는 소(疏, 건의문)를 올린다.
조헌은 "지금의 시장 마을이나 외진 여염의 늙은이와 어린 아이가 모두 당대의 임금은 있으나 신하가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今之市里窮閻 白叟黃童 皆謂當代之有君無臣). 적국의 첩자가 이 말을 들으면 해됨이 어찌 적겠습니까(若使敵國觀兵者聞之 其害豈淺淺哉)? 그런데 (영의정) 이산해가 한 번도 듣지 못하였다면 이는 귀와 눈이 없는 것이고, 알고서 고치지 아니하였으면 이는 임금을 저버린 것입니다(而山海一不聞之 則是無耳目者也 知而不改 則是負君父者也). 귀와 눈이 없는 죄는 가볍고 임금을 저버린 죄는 큽니다(無耳目之罪輕 負君父之罪大)" 하고 통탄한다.
조헌의 직선적인 건의를 본 선조가 크게 역정을 낸다. 선조는 조헌의 소를 불태워버리라고 명령한다. 그후 조헌은 임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다.
스승을 따라 임진왜란 의병이 되는 박천붕박천붕은 스승을 도와 종군한다. 하지만 청주 상당산성에서 전사한다. 안내판은 '박천붕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스승 조헌이 거느린 의병과 함께 전쟁터로 나아갔다. 왜적에 대항하여 힘을 다해 싸웠으나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박천붕의 용기있는 죽음으로 의병들은 다시 힘을 내어 다음날 청주성을 탈환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이후 왜적의 기세를 꺾은 첫 승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참고로,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에 기술되어 있는 조헌의 활약상을 잠깐 살펴본다.
'호서의병장 조헌은 5월 21일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보은을 거쳐 충청도 서남지방에서 추가로 모병하여 군세가 1천 명에 이르렀다. 이와 동시에 승군장 영규가 궐기하여 수백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조헌은 영규의 의병군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봉수하가정(蜂須賀家政, 하치스가 이에마사)의 일부 병력이 청주성을 쳐서 (충청도 방어사) 이옥을 패퇴시키고 성에 머물고 있었다. 8월 1일 조헌의 지휘하에 영규 그리고 이옥군이 성을 파상적으로 공격하니 일본군이 견디지 못하고 밤 사이에 후퇴하였으므로 성을 수복하였다.'<신편 한국사>는 조헌의 이후 활약상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