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봉쇄투쟁
공갈만
시·군농민회 사무국장들은 각기 분주하게 계획을 짰다. 계획 중에는 고속도로에 인접한 국도 가드레일을 풀어 차를 올리는 방법도 있었다. 6월 20일 예정대로 각자 맡은 고속도로로 달려가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경남경찰청 정보과장이 대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김순재는 거절했다. 총연맹에서 결의한 이상 협상할 여지는 없었다. 정보과장은 안타깝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전국에 막은 데가 없는데 경남만 다 틀어막는다."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김순재는 도연맹 사무처에 전화해 상황 확인을 부탁했다. 한 군데도 막은 곳이 없었다.
충남 당진에서는 이미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렸고 경북은 사전 차단돼 꼼짝하지 못했다. 경남은 자체적으로 판단해 마무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충남 당진에서 연행된 농민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해산하겠다는 제안을 경찰에 전했다. 당연히 경남 경찰 손이 충남에 미칠 수는 없었다.
며칠 뒤 고속도로 봉쇄 투쟁 사건으로 전국에서 130명이 입건됐다. 이 가운데 117명은 경남농민회 회원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덥수룩한 수염을 휘날리는 경남농민회 의장 강기갑을 비롯해 김순재도 연행됐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그 많은 고속도로를 일시적으로 봉쇄한 경남 농민회 저력은 어디서 오는가? 경남은 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연대문화가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보수 신문 노조의 민주노총 가입, '마산·창원'이라 가능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정치·경제 정책이 낳은 결과물이다. 경남에 고속도로가 많다는 것은 노동자들도 많다는 의미다.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 핵심은 '최소 투자와 최대 수익'이었다. 이는 당연히 노동자 희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산·창원지역은 1986년 6월 민주화 투쟁보다 1988년 노동자 대투쟁이 더 격렬했던 지역이었다. 당시 마산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집회를 했고 창원공단 노동자들은 정부가 투입한 백골단에 맞섰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중심에는 마산·창원노동자연대(마창노련)이 있었다. 전노협 핵심은 영남권과 수도권이었다. 국토 서쪽은 광주 아시아자동차를 비롯해 일부 업체만 전노협에 참여했다. 이는 훗날 영호남 간에 지역발전에서 극심한 불균형을 초래했다.
마창노련을 낳은 지역답게 마산·창원에는 독특한 연대 문화가 있다. 광주MBC는 2012년 총파업 때 지역 민주노총과 처음 교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산MBC(현 MBC경남)는 지역 노동계와 정기적으로 교류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민주노동당 사무국장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지역에서 보수적인 논조를 유지하는 <경남신문>도 민주노총 산하 언론노조 지부로 꾸준하게 활동한다. 서울로 치자면, <조선일보> 기자들이 민주노총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모양새다. 서울에서는 상상이 잘 안 되는 대목일 것이다. 그러나 지역 언론이 논조와 관계없이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이다. 그 이유는 마산·창원지역에서 노동이 언론에서 다루는 주요 소재이기 때문이다.
또 학계에서도 이 분야 연구자들 활동이 활발해 지역사회에서 늘 엮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민주노총 조합원이 소수인 한 회사의 직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회사를 상대로 목소리를 내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회사가 노조원에게 부당한 징계를 하면 노조원은 지방노동위원회로 달려갈 것이다. 거기 구성원들은 대학원 지도교수부터 시작하여 모두 안면 있는 지역사람들로, 직간접적으로 민주노총과 관련될 확률이 크다는 점이다. 경남에서는 민주노총이 농민회만이 아니라 각 지역시민사회 단체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돼 긴밀히 움직인다.
또한 경남은 고속도로만이 아니라 친일파도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각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을 상징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지역 출신 유명 근현대 인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인물들은 친일과 독재에 부역한 삶이 불거지며 논란을 낳게 된다. 지역 출신 근현대 인물 재조명 사업이 느닷없이 친일 문제에 대한 검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