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자유당의 핵심정책을 살펴보면, '동성애가 에이즈를 유발한다', '할랄단지가 조성되면 테러위험국이 된다', '반차별법이 통과되면 학교에서 개인적으로도 성경을 읽을 수 없게 된다' 등의 잘못된 주장으로 가득하다.
기독자유당
내가 30년 넘게 교인으로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온 말은 '빛과 소금'이다. 이 표현은 목사가 힘주어 전하는 설교에서, 기도자의 간절한 기도문에서 빠지는 법이 없다. 빛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고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고 맛을 더하듯, 교회가 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가 이 일을 제대로 해왔다고 믿는 사람들은 교인들 가운데서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주류 교회가 권력의 비리, 재계의 부패에 목소리 높여 비판하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교회는 세상의 불의에 목소리를 높이기는커녕, 교회 안의 불의에도 쉽게 눈을 감아왔다. '세상'의 대학에서는 논문을 표절한 교수가 해임되는 게 상식이지만, 논문을 표절한 목사는 멀쩡히 자리를 지킨다. '세상'의 공직자들은 성희롱 발언만으로도 제명 당하는 게 상식이지만, 여러 건의 성폭행 혐의를 받는 목사는 처벌은커녕 억대의 '전별금'을 받고 새 교회를 세워 승승장구한다.
물론 교회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인간적인 실수와 오류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인적 일탈이 교회의 존재 목적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개인적 일탈이 다수의 옹호나 묵인에 의해 보호받게 된다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수의 교인들이 논문 표절과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들을 지지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피해자들을 고소하고 비판자들을 제명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처럼 내부적으로는 무감각한 도덕주의가 교회 밖으로는 매우 공격적으로 표출된다는 점이다. 총선 당시 "동성애 반대, 차별금지법 반대, 이슬람교 반대"의 기치를 내걸고 참여했던 기독자유당의 경우가 그렇다. 비록 국회 진출에 실패했으나, 2.6%의 득표율은 보수 개신교의 정치세력화가 코 앞에 다가왔음을 보여주었다.
올해 초 <기독교한국신문>은 "'기독자유당' 창당이 주는 의미와 배경"이라는 사설에서 이 정당의 정치적 실험을 높이 평가하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전국교회의 기독교인을 하나로 묶어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지역선거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썼다. 흥미로운 점은, 자신과 다른 성적 성향과 종교를 지닌 사람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외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화해의 정신"을 말한다는 점이다.
오해, 무지, 모순의 연대명분은 사람을 결속시킨다. '애국'이 그렇고, '도덕'이 그렇다. 이 두 가지는 상대적 우월감을 제공해 사람을 끌어들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을 자극함으로써 유대를 강화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저쪽편'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화되거나 완전히 그릇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성 사이에 성행위만 존재하는 게 아니듯 동성 사이에도 성행위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의 관계에 사랑, 우정, 존경, 배려, 희생, 인내 등이 존재할 수 있다면, 동성 사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보수개신교는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행위'의 차원으로 단순화하기 위해 '에이즈'나 '항문성교'를 끌어들인다.
에이즈가 동성만이 아니라 이성 간의 성관계를 통해서도 전파된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항문성교'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동성애자들보다 이성애자가 훨씬 많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한국처럼 성적으로 보수적인 듯 보이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한국성과학연구소의 2003년 조사에 따르면, 자신이 동성애자와 양성애자라고 밝힌 비율은 각각 0.3%와 0.2%였고, 항문성교를 시도해본 사람들의 비율은 약 10%였다. 물론 한국 사회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큰 편이어서 응답자들이 솔직히 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외국처럼 1~4% 비율을 대입한다 해도, 항문성교를 시도하는 이성애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증오의 정치'에 중요한 것은 사실 확인이 아니다. 오직 '적'에 대해 혐오감을 갖게 하는 게 중요하다.
동성애 혐오자일수록 동성애에 흥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