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바위.발을 웅크리고 머리를 치켜 든 거북이의 모습에서 몽골제국의 힘이 느껴진다.
노시경
베이징으로 몽골의 수도를 이전한 쿠빌라이 칸(Khubilai khan)이 반란군의 근거지가 되어버린 이 하르호린을 파괴할 당시에 이 돌비석의 비신도 파괴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석재를 길쭉하게 다듬어 만든 비신은 파괴하기 쉬웠지만 이 귀부는 부수기도 어렵고 옮기기도 어려울 정도로 커서 지금까지도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다리를 한껏 오므린 채 고개를 쳐들고 자신 있게 올려보는 모습에서 당시 세계로 뻗어나가던 몽골제국의 힘이 느껴진다. 까맣게 이글거리는 거북이의 눈빛과 꽉 다문 입이 마치 당시 몽골인을 보는 듯해서 오싹해지기도 한다.
이 거북이 몸체의 등에 세워져 있었을 비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 정확한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원래 이 거북바위는 하르호린 왕궁을 지키기 위해 왕궁 입구의 사방에 4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도 수없이 많은 귀부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위대한 인물의 무덤이나 고승의 부도 앞에 있으니 이 거북이 등 위에도 어느 영웅의 서사시적인 일대기를 그리는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누가 이곳까지 이 무거운 거북바위를 옮겨놓지는 않았을 것이니, 이곳에 귀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곳에 바로 만안궁이 있었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귀부 위의 비석은 사라졌지만, 인근 에르덴 조 사원에서는 방치된 일부 석재 중에서 만안궁과 관련된 비문이 발견되었다. 에르덴 조 사원 건축 당시 폐허가 된 만안궁 터에 있던 석재를 이용하여 사원을 지었기 때문이다. 몽골어 아래에 한문이 함께 조각된 비문 조각 5개가 수습되었는데, 확인해 보니 흥원각비(興元閣碑)의 잔해였다.
흥원각(興元閣)은 하르호린이 몽골의 수도였던 몽케 칸(Mongke Khan) 시대에 창건된 전각이다. 이 흥원각 터에서는 '흥원각'이라는 이름이 명확히 적시된 편액(扁額)도 함께 발견되어 이곳이 만안궁 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흥원각비 조각은 원나라 때의 문필가 유임(有壬)이 지은 칙사흥원각비(勅賜興元閣碑)의 비문 일부였으며 원래 만안궁 내에 세워졌던 비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광야에 남은 거북바위의 비석이 흥원각비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이 거북바위의 등 위에 남아있던 비석도 원나라가 흥하기를 바라는 내용을 함께 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거북바위가 초원에 뜬금 없이 홀로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 거북바위 주변은 1235년에 제2대 칸(汗)인 오고타이(Ogotai)가 금(金)나라 원정에서 돌아온 후 도성을 정하고 성벽과 함께 몽골 제국의 왕궁, 만안궁(萬安宮)을 만든 곳이다. 만안궁은 귀위크 칸(Güyük Khan)을 거쳐 몽케 칸(Möngke Khan)이 사망한 1259년에 이르는 20여 년간 제국의 중심지였다. 당시 이 곳을 중심으로 몽골 제국 전역에 걸쳐 도로망을 정비하고 곳곳에 역사(驛舍)를 두어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편하게 왕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라면 이 하르호린과 만안궁의 역사를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1235년부터 4년간 3차례나 고려를 침공하여 한반도를 초토화시켰던 몽골군의 침공 군대가 출발하였던 곳이 바로 이 하르호린이었다. 그 이후 1247년~1248년, 1253년~1254년, 1254년~1259년 고려 침공의 의사결정도 바로 이곳 하르호린의 만안궁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고려에서 잡혀온 포로만도 2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80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당시 고려의 백성들에게는 피눈물 나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당시 몽골제국의 강인함을 칭송하는 것은 700년 후의 후손들이 조선을 침략했던 강력한 일본군대에 감탄을 보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거북바위 주변을 둘러보니 유적지 여기저기가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거북바위 주변의 많은 흙무지와 철조망 울타리가 있는 곳이 바로 몽골 제국 왕성의 발굴 현장이다. 주변에는 13세기의 유물일 수도 있는 기와 조각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궁궐의 영역이 어디까지였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지만 거북바위를 중심으로 에르덴 조 사원과 그 동쪽 평원이 모두 만안궁 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거북바위 등 위, 비석이 박혀 있던 홈에는 소원을 비는 작은 돌들과 지폐 몇 장이 들어 있다. 현재의 몽골인들은 이 거북바위가 당시 왕도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다고 믿고 있기에 지금도 거북바위에게 소원을 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복 많게 생긴 거북의 얼굴을 만지면 복이 온다는 믿음도 있다. 몽골인 가족들 여러 명이 와서 순서대로 거북의 얼굴을 만지며 소원을 빈다. 몽골인들이 소원을 빌면서 거북의 얼굴에 기름칠을 해서 거북의 얼굴은 시커멓게 번지르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