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 속 이것, 그야말로 '특종'

[포토에세이] 매봉산 산책길에 만난 이슬

등록 2016.04.26 16:08수정 2016.04.26 16:08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이슬 시골이나 깊은 산 중에서 만난 것이라면 당연하게 여겼을 터인데, 서울 하늘 아래서 이슬을 만나니 감회가 더욱 새롭다. ⓒ 김민수


두 주일 전, 매봉산 자락으로 이사했다. 아직 모든 것이 낯설지만 정 붙이고 살아가야 할 곳이니 시간이 날 때마다 집 주변을 탐색하게 된다.


며칠째 미세먼지로 시야가 흐려서 큰 기대하지 않고 매봉산으로 향했다. 그 산이 매봉산인 줄 안 것은 사실 며칠 전이다. 이사한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책로가 연결되어 있어 올라갔는데 그곳이 매봉산 자락이었다.

제법 산세가 험하고 깊다. 도심에 자리하고 있는 산이다 보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산책을 하다 풀잎 사이에 맺힌 이슬을 만났다. 아침이긴 했지만, 습기가 많지 않은 날이었기에 서울 하늘 아래서 이슬을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슬로 인해 매봉산 산책로 주변의 식생에 관해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a

이슬 일액현상이 잘 일어나는 찔레꽃 이파리에 이슬이 맺혀 있다. 서울 하늘에서 이런 모습을 보는 것은 행운이다. ⓒ 김민수


일액현상(식물에 흡수된 수분 중 일부가 배출되는 현상)을 잘 보여주는 찔레도 있다. 5월에 찔레꽃이 피어나면 제법 찔레꽃 향기도 맡을 수 있겠다. 도시에서 조금 벗어나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들이었지만, 도심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풍경이니 그야말로 특종이다.

어느새 봄이 다 갔다. 봄을 맞이하려고 입춘지절(立春之節)이 지났음만 믿고 흰 눈이 가득 쌓인 산을 찾기도 했고, 너도바람꽃과 노루귀가 피어날 즈음에는 그들과 눈맞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삶이라는 것이 사람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지라, 그 이후 매봉산 자락을 거닐기 전까지 너무 분주해서 봄을 제대로 볼 틈도 없이 보내버렸다.

a

조팝나무 조팝나무가 피기 직전부터 바쁜 일상이 시작되었는데 이제 조팝나무가 내년을 기약하며 지고 있다. ⓒ 김민수


이미 끝물을 향하는 조팝나무를 보면서 미안했다. 올해는 봄이 많이 빨라졌다고도 하지만, 피어난 꽃들에 대한 예의를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쁘면 눈이 먼다는 것을 실감했다. 빨리빨리, 경쟁은 천천히 느릿느릿 살아가면 으레 보이는 것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오로지 마몬(신약성서에서 물질적인 부유와 탐욕을 뜻하는 것)만 바라봐 눈을 멀게 한다. 사람들은 눈이 멀어버린 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거의 한 달 가까이 글도 한 편 제대로 쓰지 못했고, 사진도 제대로 찍질 못했다. 바쁜 삶이라는 것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 실감하는 날들이었다. 그러나 다 나쁜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 시간을 어떻게 쌓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름 깊은 성찰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a

화살나무 녹색꽃은 흔하지 않은 꽃 중 하나다. ⓒ 김민수


꽃 이름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나이 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아쉬운 순간이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멀어지면 잊게 되는 것이구나 싶다. 한때 식물도감 없이도 이름을 불러주지 못할 꽃이 없다고 자부했는데, 이젠 다시 처음 배울 때처럼 다시금 식물도감을 보며 천천히 이름을 복기해야 잊지 않을 듯하다.

이전 같으면 화살나무처럼 조경수로 심어진 나무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내 삶의 자리가 여간해서는 도심을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 되었으니, 조경수라도 감지덕지하지 않을 수 없다. 척박한 경쟁의 도시에서도 그들은 경쟁하지 않으면서 피어난다는 것, 그것으로 위안을 받는다.

a

박태기나무 보랏빛 박태기나무가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 김민수


문득, '이것도 기삿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싶다.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써온 기사들에 대한 반성이 들기도 하고, 이런 것이 기사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나에게는 더는 새로울 것도 없으니 쉬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맺은 이후, 가장 긴 침묵 끝에 글을 올린다. 물론, 내가 없어도 건재했고, 내가 있어도 있는 티는 나지 않았으니 한편으로 마음이 편안하기도 하다. 시민기자 13년, 이제야 기사다운 기사를 쓸 수 있을 것도 같다. 왜냐하면 이젠 정말 너무 절실해서 기사로 쓰지 않으면 안 될 이야기 외에는 쓸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만 슬며시 멀어질까 생각도 했었는데, 뜻밖의 행운처럼 이슬을 만나 언젠가 나에게 스스로 다짐했던 대로 셔터를 누를 힘이 남아있고, 자판을 두드릴 힘이 남아있는 한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봄날, 그 찬란한 4월이 이렇게 급하게도 가고 있으니 '잔인한 달'이라는 시인의 말이 틀리지만도 않은 듯하다. 물론, 그 시인은 다른 의미로 잔인한 4월이라고 했겠지만 말이다.
#서울 #매봉산 #이슬사진 #박태기나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러다간 몰살"... 낙동강 해평습지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일
  2. 2 주민 몰래 세운 전봇대 100개, 한국전력 뒤늦은 사과
  3. 3 한밤중 시청역 참사 현장 찾은 김건희 여사에 쏟아진 비판, 왜?
  4. 4 "곧 결혼한다" 웃던 딸, 아버지는 예비사위와 장례를 준비한다
  5. 5 요즘 6070의 휴가법은 이렇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