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의 흑인 노예선 설계도당시 최고의 상품인 인간을 최소공간에 최대로 넣는 방법을 보여주는 유명한 설계도다. 배 안에 시체를 넣는 곳도 보인다. 많은 흑인이 운송 도중에 죽었음을 알려준다.
미국사 다이제스트.가람기획
해리엇 터브먼의 생애그들은 백인들의 총칼과 폭력 속에 두려움에 떨면서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노예의 자식들도 부모의 삶을 이어받아 똑같은 노예의 삶을 살았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리를 가슴에 품고 스스로 자유를 찾고 동료 흑인들의 자유까지 찾으려 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이 바로 해리엇 터브먼(1820~1913)이다.
그녀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백인들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흑인 노예선에 실려왔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미국 사회는 농업 중심의 남부와 공업 중심의 북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남부와 북부 모두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나 남부에서는 흑인 노예들을 아무런 임금 없이 짐승처럼 대했다. 하지만 북부의 공장주들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남부의 흑인 노예들에게 약간의 임금과 자유를 보장했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흑인 노예의 입장에서 북부는 천국이었다.
그렇게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흑인들은 남부의 흑인 노예들을 북부의 자유지대로 탈출시키는 이른바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활동했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해리엇 터브먼이었다. 비밀 지하조직으로 운영되다 보니 경로와 조직원들은 모두 철도 용어에서 따온 은어로 불렀고 안내자는 '차장'으로, 은신처는 '역'으로, 그곳 책임자는 '역장'으로 불렀다. 또, 돈을 지원하는 사람은 '주주'로, 탈주 중인 노예는 '승객'이나 '화물'로 명명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 비로소 운행이 종료된 이 지하철도는 최대 10만 명 정도의 흑인 노예를 탈출시켜 그들에게 자유의 새 삶을 선사했다. 그녀는 이 지하철도 조직에서 '차장'으로 활동하며 힘들게 모은 돈을 털어 흑인 노예들이 자유를 찾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61년 미국 북부와 남부 사이에는 전쟁이 터졌고 그녀는 흑인 해방을 위해 북군에 종군했다. 그녀는 북부 연합군의 일원으로 요리사로 간호사로 또는 무장정찰병으로 스파이로 맹활약하였다. 4년에 걸친 전쟁으로 북부는 승리를 거두었다. 형식적으로 흑인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뿌리 깊은 차별과 멸시는 지속되었다.
미국은 오랫동안 '동등하게 대우하지만 분리한다'는 애매한 정책으로 여전히 흑인들을 차별하였고 그 차별과 그에 따른 흑백 갈등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녀는 남북전쟁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라는 말을 하며 흑인 인권과 여성 참정권 운동을 계속했고 죽어서 미국 전역에서 우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