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천안문광장.
김종성
북한은 1950년부터 3년간 미국과 전쟁을 했다. 그리고 그 뒤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고자 북한은 수교를 희망했지만, 미국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미국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이 그렇게 하는 데는 자체적인 전략적 판단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만, 북한의 라이벌인 한국이 자국의 동맹국이라는 사실도 적지 않게 작용하고 있다.
적대관계 속에서 압박을 주도한 쪽은 주로 미국이다. 미국은 외교·군사·경제 방면에서 압박을 가했다. 이런 가운데 북한은 핵실험을 통해 미국을 곤혹스럽게 하는 한편, 계속해서 수교의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핵 보유를 공식적으로 부정하면서 대북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
위의 두 문단은 1945년 이후 북미관계에서 나타난 주요점을 대략 정리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주요점이 1970년대까지의 미중관계에서도 거의 그대로 표출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중국으로 불리는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대결했다. 이런 적대관계는 전쟁 후에도 계속됐다. 하지만, 중국은 그런 관계를 원치 않았다. 이 점은 한국전쟁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부터 중국은 외교부장 주은래(저우언라이)를 통해 대미 수교를 추진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중국의 러브콜을 거부하고 외교·군사·경제 분야의 중국 봉쇄 정책을 전개했다.
북한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에 타이완의 중화민국을 합법적인 중국 정부로 인정했다. 타이완을 기준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북한이 그랬던 것처럼 중국도 핵개발을 강행했다. 경제곤란이 심각할 때인 1959년부터 중국은 핵개발을 강행했다. 이런 상황은 1964년 핵실험 단행으로 이어졌다.
핵은 1945년 이후의 세계를 지배하는 무기다. 세계 지배자 반열에 포함되는 국가들만 현존 국제체제 하에서 합법적으로 이것을 보유할 수 있다. 중국이 최초의 핵실험을 할 당시, 이미 핵실험을 한 나라는 미국(1945년), 소련(1949년), 영국(1952년), 프랑스(1960년)뿐이었다. 이들은 다들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상임이사국들이다.
이렇게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를 당시의 중국이 갖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미국과 세계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중국의 핵개발을 차단하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중국의 열망은 대단했다. 중국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핵개발을 밀어붙이자, 미국은 소련·영국을 끌어들여 중국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1963년, 미국과 소련·영국은 공동으로 중국을 봉쇄하자는 합의를 도출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같은 공산권 국가인 소련이 중국의 핵개발을 반대한 것은 중국과의 라이벌 관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이후로 더 이상의 핵 보유 국가는 없어야 한다'는 핵보유국들의 일반적 심리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북한의 핵 보유에 대한 중국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련·영국이 함께하는 국제 공조에 힘입어 미국은 중국을 향해 전쟁위협 발언까지 던졌다. 핵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중국 서부의 신장위구르는 물론이요 수도 베이징까지 폭격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이때가 1963년이다. 하지만, 이듬해에 있었던 중국의 핵실험으로 삼국의 국제공조는 사실상 무색해지고 말았다.
중국의 핵실험 이후로도 한동안 미국은 기존의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사정변경이 있었다. 그간 중국의 수교 제의를 외면했던 미국이 "그때 했던 그 제의, 아직 유효하냐?"며 중국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정세 변화가 있었다.
정세 변화라는 것은 1960년대판 중동 전쟁인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곤경에 처하게 된 일을 말한다. 오늘날 미국은 중동 전쟁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다. 1960년대에는 베트남전쟁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 그래서 '1960년대판 베트남전쟁'이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