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문호 처 포산곽씨 정려기
정만진
정경세는 비명에 곽준의 선조들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곽준의 고조부 곽안방은 청렴결백으로 이름이 높았던 조선 초기 선비이고, 증조부 곽승화는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두 수제자였으며, 조부 곽미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남쪽(고향 현풍)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밖에 나가지 않았던 인물이다. 곽준의 아버지는 곽지완, 어머니는 초계 정씨(草溪鄭氏)였다.
12정려각의 핵심, 곽준 가족과 네 효자
사효굴 앞 안내판의 안내문 |
사효굴(四孝窟) 달성군 유가면 양리 360
사효굴의 유래는 망우당 곽재우의 사촌형인 곽재훈의 네 아들과 관련 있다. 곽재훈의 슬하에는 결, 청, 형, 호의 네 아들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병환 중인 부친을 모시고 비슬산 중턱에 있는 동굴에 숨어 피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부친의 천식이 심해 기침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어느날 굴 밖을 지나던 왜병들이 기침소리에 굴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고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이에 효성이 지극한 큰아들이 부친을 대신해 나갔다가 죽임을 당했고, 같은 방법으로 나머지 세 아들 또한 차례로 살해당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곽씨가 굴 밖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에 그 간의 정황을 알게 된 왜장은 네 형제의 효성에 감동하여 곽씨의 등에 '네 아들의 효자(四孝子之父)'라는 글을 써붙여 석방하였다. 그 후 마을사람들은 이 곳을 '사효굴'이라 이름하여 네 형제의 효성을 추모하였고, 나라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정려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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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곽씨12정려각 앞 안내판은 곽준과 그의 아들, 딸, 며느리의 장렬한 죽음, 그리고 곽재훈의 네 아들이 비장하게 죽은 사효굴을 핵심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비각 안에 걸려 있는 열두 정려기들과 두 기의 빗돌을 살펴보니, 안내판의 해설에 나와 있지 않는 임진왜란 피해자가 한 분 더 발견된다.
'곽재기 처 광릉이씨가 왜란 중 적을 만나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遇賊投水而死事)'라는 정려기가 바로 그것이다. 현판의 검은 빛깔이 마치 당시의 처참한 광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만 같아 비각 안을 들여다보는 마음을 눈물겹게 한다.
12정려각에 모셔져 있는 주인공들은 모두가 곽안방의 후손들이다. 따라서 12정려각 관련 유적지를 답사하려면 곽안방이 모셔진 이양서원(현풍면 삼강3길 23), 곽안방의 후손들을 제향하는 화산서원(구지면 화산리 898), 곽준이 홍의장군 곽재우 함께 배향되고 있는 예연서원(유가면 구례길 123번지), 그리고 사효굴(유가면 양리 산144)을 찾아야 한다.
여정의 효율성을 생각하면 불과 1km 거리에 있는 이양서원부터 먼저 찾는 것이 당연하다. 그후 2.5km 남짓 더 나아가 화산서원을 둘러볼 일이다. 예연서원과 사효굴은 화산서원 가는 길과 반대쪽인 비슬산 기슭으로 들어가야 한다. 현풍곽씨12정려각에서 예연서원까지는 대략 5km, 예연서원에서 사효굴까지는 다시 6km가량 된다.
이 일대를 완벽하게 두루 둘러보려면 현풍곽씨12정려각> 이양서원> 화원서원> 송암서원> 도동서원> 홍의장군 곽재우 묘소> 예연서원> 사효굴> '빨간 마후라' 기념관> 유가사 순서로 여정을 잡아야 한다. 등산이 가능한 답사자는 유가사를 둘러본 뒤 비슬산에 올라 대견사 삼층석탑과 빙하기 암괴류를 감상할 일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곳을 단숨에 모두 찾아보겠다는 계획은 현실저긍로 무리미으로, 우선 현풍곽씨12정려각> 이양서원> 화산서원 세 곳부터 둘러보면서 하루의 보람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