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예민함을 탓하는 구조는 항상 폭력을 유발하며, 지나치게 가해자 중심의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그 생각을 놓지 못할 때 학번 기반의 위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된다. 3월에 즐비한 OT 성폭력, 구타 사건, 주도 강권 등은 권위가 어떻게 폭력을 불러오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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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인의 예민함을 탓하는 구조는 항상 폭력을 유발하며, 지나치게 가해자 중심의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그 생각을 놓지 못할 때 학번 기반의 위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된다. 3월에 즐비한 OT 성폭력, 구타 사건, 주도 강권 등은 권위가 어떻게 폭력을 불러오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앵무새처럼 들려오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거나 '친해지려고', '재미를 위해 등의 해명에선 집단이 자연스레 갖는 권위가 개인의 존중받을 권리를 얼마나 쉽게 짓밟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발이 예민한 (취급을 받는) 개인에게 얼마나 힘든지도 뚜렷하게 보인다.
사실 학번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도 않다. 개인의 불만을 내재하고, 그 불만을 밀어내는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집단에까지 그 피해를 확장한다. 꼭 신입생들의 흡연과 화장을 통제하거나 '다나까' 말투를 '군대식'으로 강요하는 몇몇 악명 높은 학교들이 아니어도 그렇다. 위계 문화를 당연시하는 집단에서 '군대 문화'는 알게 모르게 곪아간다. 올해가 아니면 내년에, 내년이 아니면 후년에, 언제든지 우리의 학교도 '폭탄'이 될 수 있다.
방법은 한 가지다. 효율적이지도 아름답지도 못한 그 지겨운 '미풍양속'을 우리 손으로 끊어내는 수밖에.
'나이제'도 옳지 않다'학번제'의 반대급부로 다뤄지는 것이 바로 '나이제'다. 대단치도 않은 학번에 집착하지 말고 나이에 맞춰 존대한다는 것이 나이제의 간략한 취지. 그리고 많은 부분 나이제는 불합리한 학번제에 대항하는, 훨씬 민주적이고 자연스러운 제도로 여겨진다. 오죽하면 "우리 학교는 학번제 안 하고 나이제를 우선시한다"하는 말이 '민주적인 으스댐'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권위에 대한 오랜 오해에 불과하다. 숙지하자. 중요한 건 권위의 방향이 아니라 해체다. 어디에 권위를 둘지가 아니라 어떻게 권위를 없앨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누가 존대 받아야 할까가 아니라 당연히 모두를 존중해야 함을 논의해야 한다. 학번이 대단치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이 또한 절대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나이제는 학번의 권위를 나이로 대체한 것뿐이다. 대학 내에서 '학번'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회에서 '나이'는 권위주의의 마땅한 근거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15학번이 16학번에 권위를 말하는 것이 옳지 않듯이 스물한 살이 스무 살에게 권위를 말하는 것 또한 옳지 않다. 그러니까 누군가 학번제에 분노하며 나이제를 주장한다면, 사실 분노의 안팎에서 그들이 사용하는 권위의 문법은 같다는 거다.
그게 왜 옳지 않으냐고? 같은 답의 반복이다. 당연하게도 '모든 개인은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며, 그 존중에 조건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고 적은 것, 학번이 높고 낮은 것, 그 밖의 다른 어떤 조건에도 '우열'은 없다. 그게 진짜 존중의 시작이다.
진부하지만 핵심은 '존중하기'권위주의에 변명은 소용없다. 하여 나이제에도 학번제에도 변명은 필요 없다. 남는 건 결국 진부한 정답이다. '서로 존중할 것'. 나를 존중하는 만큼 남을 존중할 것. 오래된 종교의 교리마냥 뻔하디뻔한 이 문장이 학번제와 나이제를 넘어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다.
학번이 높든 나이가 많든 우리는 전혀 대단하지 않다. 설령 대단하다 하더라도 그게 권위의 근거는 될 수 없다. 나이가 더 많다고, 학번이 더 높다고 타인에게 무언가를 강압적으로 요구할 수도 없다. 간단하지 않은가. 수백 번 이불 차며 생각해봤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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