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균 교수.
교수노조
이처럼 상대가 나를 좋아하면 연대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음 고민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것인지로 넘어갔다. 경청, 존중, 이해 같은 덕목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사람들을 만나는 태도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석궁 사건'을 거치면서 깨달은 것은 이 정도다.
'석궁 사건'을 계기로 2009년 서민들이 벌이는 소송 전쟁으로 관심사가 넘어갔다. 이는 두 번째 작품 <법과 싸우는 사람들> 배경이 됐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이 주제에 매달렸는데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당시 취재원은 임정자(1943년생)씨다. 힘은 없지만 신념 하나는 강한 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은 현실에서 파멸로 향하는 기차였다. 힘없는 그녀가 강하게 부딪히는 상대는 현실에서 힘을 쥔 사람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A는 법을 어겨도 검찰에 가면 벌금 백만 원에 그쳤고, 그걸 또 정식재판청구를 하여 법원에 가면 무죄를 받았다. 그 판결문을 다시 지상파 뉴스가 받아주며 A의 기세를 높였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시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자 검찰이 항소한 상태였다. 나는 언론사를 찾아다녔는데, 기사 거리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언론은 서울대 출신 교수가 판사에게 석궁을 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범한 억울한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론과 연대는 기대할 수 없었다.
또 한 번 확인한 네트워킹의 위력이 상황에서 법원에 제대로 된 판결을 해달라는 신호를 보낼 방법은 뭘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터 5부까지 부장검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말도 안 되는 사안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검사님! 부패검사의 실력을 보여줍시다'라고 썼다.
그랬더니 검찰이 반응을 했다. A의 항소심에 내가 보낸 편지를 추송서(재판과 관련된 일체의 추가 서류)로 제출한 것이다.
내가 검찰에 편지를 보낼 때마다 검찰은 이를 추송서로 법원에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