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박씨 노비 최의남의 공을 기려 세운 정려각
김종신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 시대는 양반이 주도하는 사회였다. 비록 조선 시대 노비 수가 전체 인구 중 최소 30%가 넘었다지만 노비를 위한 정려비는 드물다. 경남 지역에는 함안군 여항면 무진정 부근에 무작금 충노비가 있고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 상발의 충노비가 있다.
최선을 다한 노력을 기리는 정려각 안에는 가로 33㎝, 세로 73㎝, 폭 8㎝ 크기에 충노효자최의남지려(忠奴孝子崔義男之閭)라고 적힌 현판이 붙어 있다. 현판 아래에는 "충노효자최의남지비(忠奴孝子崔義男之碑)"라고 새긴 소박한 돌비가 서 있다.
<진양속지>에 따르면 "최의남은 동산리 박씨 집의 사노(私奴)였다, 그의 주인이 일찍 죽고 남은 재산이 없었다, 다만 한 고아만 있었으나 최의남은 주인집 제사를 받들어 향불이 끊이지 않게 하고, 또 주인집 아이를 등에 업고 다니며 배움을 성취하게 했다, 숙종 13년(1686년)에 이런 일이 알려지자 충노로서 정려를 내리도록 했다"고 한다.
이후 박씨 문중에서 노비 최의남의 공을 기려 비를 세웠다. 또한, 최의남은 주인집 아들을 매일 보살핀 까닭에 정작 자신의 늙은 어머니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자신이 주인집 아들을 섬기는 것처럼 시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한다고 처를 아홉 번이나 내쫓았다고 한다. 매년 음력 10월이면 함양 박씨 문중 사람들이 비각 앞에서 제사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