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개의 크고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 도로가 힌두사원. 운전자들은 이 사원 앞에서 잠시 차를 세워 신에게 무사고를 빈다.
송성영
절벽 길을 따라 얼마쯤 흥청망청 달려가던 지프차가 도로가에 있는 힌두사원 앞에 멈춰 선다. 절벽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사원 앞에는 크고 작은 종들이 수십 개 매달려 있다. 사원 앞에 서 있던 사내가 접시를 들고 지프차 옆으로 다가와 운전기사의 이마에 무사고를 기원하는 붉은 가루를 찍어 준다. 그 사내에게 운전기사가 지폐 한 장을 건네며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신이 당신을 보호해줄 것입니다.""얼마를 내면 됩니까?""당신이 원하는대로요."내가 접시를 든 사내에게 10루피를 건네자 운전기사가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환하게 웃어 보인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몇 푼의 루피로 신의 가호를 받은 운전자는 정신없는 인도 노래를 따라 부르며 또다시 사정없이 지프차를 몰아 내달린다.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참으로 낙천적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하지만 저 아래로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절벽을 아찔하게 바라보며 그 생각을 접는다. 최소 200미터쯤 되는 저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무지무지 아프게 죽을 것만 같다.
고행길이 따로없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고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는 죽음을 떠올려 본다.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죽음은 언제 어느때고 불쑥 다가오기 마련이다. 내가 이 지프차에서 내리지 않는 이상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
저들이 죽고 싶어 환장해서 흥청망정 음주운전을 하겠는가. 저들에게는 일상이다. 인도의 또다른 얼굴이다. 저들의 일상을 받아들이자. 내가 죽음을 떠올리든 망각하든 지프차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굴러가게 돼 있다. 지프차에서 내리지 않는 이상 받아 들여야 할 현실이다.
절벽 아래로 칼리강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칼리강은 '분노와 용기의 신'인 힌두교의 여신. 마하칼리에서 따온 강이다. 네팔에서는 이 강을 마하칼리(Mahakali River) 혹은 칼리(Kali)강으로 부르고 있고 인도에서는 칼리강가(Kaliganga)혹은 샤르다(Sharda)강으로 부르고 있다. 피 묻은 얼굴로 혓바닥을 길게 내민, 네 개의 팔에 해골 목걸이를 한 기괴한 여신, 마하칼리의 그림이 떠올랐다. 내 안에 이 무시무시한 여신 마하칼리가 강림한 것일까. 운전기사에 대한 분노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내 마음자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지프차 안의 운명공동체는 아무런 요동도 없다. 분노와 용기의 여신, 마하칼리를 껴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이 험난한 길은 일상에 불과한 일이겠지만 난생처음 겪어 보는 나로서는 황당한 현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황당한 현실을 받아들여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다 잡아나갔다. 차장 밖으로 아슬아슬하게 펼쳐져 있는 풍경을 사진기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런데 천 가방 주변에 놓았던 사진기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지프차가 비포장도로의 험한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덜커덩거리는 사이에 좌석 아래로 굴러 떨어져 앞좌석 밑 어딘가에 박혀있을지 모른다. 좌석 밑을 살펴봤는데 사진기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가져갔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잠깐만 차를 멈춰주세요.""무슨 일입니까?"운전기사에게 사진기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더니 즉시 응답이 온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다. 넓은 도로가 나오면 거기서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지프차가 멈춰 서자 다들 좌석 밑을 들여다본다. 앞좌석에는 없다. 내가 탄 맨 마지막 좌석 틈 사이에 박혀 있는 사진기를 인상이 험상궂은 운전기사가 찾아냈다. '고맙다'고 했더니 '천만예요'라며 환하게 웃는다. 또 다시 사람이 달라 보인다. 음주운전을 하고 있지만 역시나 선한 구석이 많은 친구였다.
운전기사를 오락가락 판단하고 있는 내 간사한 마음이 뿌리째 드러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반밧사까지 한 시간 정도 남겨 놓고 마지막 휴게소에서 차가 멈춰 섰다. 네팔 노동자들은 화장실을 다녀와 차안에 앉아 있고, 점심 식사를 하면서 술을 마셨던 세 사람은 휴게소에 앉자마자 술병을 꺼낸다. 휴게소 주인도 술판에 끼어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술에 콜라와 물을 타서 마시고 있다.
그는 내게도 술을 권했고, 나는 공범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