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탈출기'를 이야기하던 김 노인에게 최고의 공약은 보이지 않는다.
허빈
인민군이 두려웠던 그는 남한으로 가는 배에 몸을 숨겨 고향을 떠났다. 그가 평양을 탈출한 이유는 '자유'였다. 한 달 뒤 김씨는 서울에 도착했다. 분단 한 가운데 있던 김재삼씨에게 당시의 경험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아흔 한 살의 노인에게 스물셋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에게 서울은 아직도 '자유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김씨에게 나라를 지키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 이야기를 꺼내자 김씨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해졌다. 통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북한만큼은 맞서 싸워야 할 적으로 여기는 그였다.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 북한에 끌려 다니는 거야. 걔네한테 뭘 퍼주고 양보하는 건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이야. 걔네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북한 앞에서는 강해야 해." (김씨)"Just Do it" 오철씨의 신념탑골공원에서 친구를 기다리던 오철(65)씨의 인생은 '노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는 지나온 자신의 인생에 자부심을 느낀다.
"내가 100만원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어. 학교? 나는 돈벌이를 빨리 시작했지. 그래서 미싱도 1,000대까지 돌려보고. 일본에 가서 도로 공사 기술도 배워 왔어. 경부고속도로부터 남해고속도로까지 내 손이 안 닿은 도로가 없지." (오철씨, 65세)지금의 강남 땅에 투기가 시작됐고 고속도로가 생겨나던 시절이었다. 오씨는 남들보다 부지런했다. 노력한 만큼 그는 대가를 얻을 수 있었다. 반대로, 노력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던 나라 위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낸 오씨에게, 무상 복지는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었다.
"무상급식? 에이, 그거는 하면 안되는 거야. 어느 정도 노력한 사람에게 뭘 제공하는 건 맞지. 처음부터 공짜로 막 퍼주는 건 아무 도움도 안되는 거야. 정부가 지금도 충분히 잘 해주고 있어. 옛날에는 하나도 해주지 않았어. 노인들이 탑골공원에 올 수 있는 것도 정부에서 주는 공짜 차 표 덕분이고. 이 정도면 충분하지."오씨는 젊은 세대를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큰 돈을 버는 것은 욕심이다"면서 "학교 앞에서 과자 장사라도 시작하거나 아니면 여기서 커피라도 한 잔씩 팔아"라고 말했다.
"내 손주가 여섯 살이야. 아직 어려. 나는 장난감을 사서 그 애랑 일종의 계약을 해. 책 한권을 앞에 가져다 놓고 이걸 읽으면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말하는 거야. 원하는 걸 받고 싶으면 걔도 뭘 해야지."열심히 하면 되던 시대를 살아온 노인의 '노력=성공' 방정식은 여섯 살 손주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탑골공원에서 '세월호특조위 반대' 서명 받는 이들의 이야기탑골공원 앞에서 서명을 받던 박점순(67)씨는 '월드피스자유연합' 소속 회원이었다. 이 단체는 6·25 전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활동 등을 하는 곳이다. 박 씨를 비롯한 단체 회원들은 공원 정문에서 '세월호특조위 해체', '정부 4대 개혁 추진' 등을 위한 서명을 받고 있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6·25 전쟁을 겪었지. 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그래서 내가 유족회 단체장도 맡아서 6·25 사진전도 열었는데.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이지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사비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어." (박점순씨, 67세)박씨는 젊은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서 하나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전쟁은 끔찍해. 얼마나 참담한 일인지 젊은 세대는 몰라. 우리가 전쟁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이 나라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교육을 잘 받았으면 좋겠어. 내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잖아. 나도 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싶어." (박씨)사실 박씨는 전쟁 말고도 끔찍한 경험을 한 차례 더 겪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지정당은 딱히 없다"고 말했다. 그의 고향은 광주.
"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좋아하지는 않아. 광주 민주화 운동 때 그 자리에 있었어. 계엄군이 총으로 다 쏴 죽이고, 길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어. 피 묻은 고무신이 아직도 생각나. 나는 벌벌 떨면서 숨어 있었어···." (박씨)'무조건 1번, 그래도 1번'"눕기만 하면 서울 전역이 내 방"이라던 김귀한(65)씨는 한낮인데도 술기운으로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그의 억센 체격은 무료 급식소 골목에 있는 노인들 가운데서 유독 눈에 띄었다.
"젊었을 때부터 이삿짐 나르는 일을 했어. 그거 아나. 옛날에는 요즘처럼 사다리차가 없어서 사람이 다 옮겨야 했지. 내가 그 땐 힘이 좋아서 큰 피아노도 5층까지 들어서 올리고 그랬어. 배우 김자옥씨 이사도 내가 했지. 팁으로 10만원과 양주 한 병을 받았고." (김귀한씨, 65세)김씨는 40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나와 노숙 생활을 시작했다. 가족은 어쩌고 집을 떠났냐는 물음에 그는 눈물부터 흘렸다.
"결혼했지. 그 때는 내가 끼가 좀 있었거든. 한 달에 3천원씩 벌면서 월셋방에 살다가 첫 애를 (아내가) 임신했어. 그런데 도저히 낳아서 키울 자신이 없는 거야. 가난했으니까. 그렇게 첫째를 유산시키고, 둘째도 그렇게 됐지." (김씨)붉어진 그의 눈에서 70,80년대의 가난이 보였다. 당시 대통령은 어땠냐는 물음에 김씨는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은 물가를 잘 잡았어"라며 "(두 대통령) 덕분에 살기 좋았지"라고 답했다. 당신은 형편이 어려워 자식을 잃어야 하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그래도 물가는 잘 잡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김씨는 투표가 있을 때마다 1번을 찍는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1번이 뿌리였어. 우리나라가 잘 살려면 1번을 찍어야 해."대화 도중 김씨는 "술, 담배를 하느냐"고 물었다. "담배는 안 피우지만 술은 마신다"고 답하자 "요즘 술값이랑 담뱃값이 너무 올랐어. 서민들 먹는 건 다 올려"라고 푸념을 했다. 술, 담배 값 올린 게 1번이라는 말에 "그래? 그래도 1번을 찍어야 하는데"라며 멋쩍게 웃는 그였다. 가난에서 헤어 나온 적 없는 그에게도 성장 시대의 향수는 진득하게 남아 있었다.
세월호 세대가 있듯